남아메리카의 역사

아니타 가리발디: 브라질과 이탈리아를 잇는 '두 세계의 영웅'

아니타 가리발디(Anita Garibaldi, 1821~1849)는 본명 아나 마리아 데 헤수스 리베이루 다 실바(Ana Maria de Jesus Ribeiro da Silva)로 태어난 브라질 혁명가로, 브라질의 공화정 수립과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평생을 싸운 인물입니다.

아니타 가리발디의 생애

아니타 가리발디는 1821년 브라질 산타카타리나주(Santa Catarina)의 라구나(Laguna)에서 상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4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신발 장인과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3년 만에 끝나고 맙니다.

남편은 제국군에 입대했던 반면, 아니타의 가족은 브라질 제국에서 분리 독립을 원하던 파호피류(farroupilhas)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18세 되던 해, 아니타는 이탈리아 출신 게릴라 지도자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를 만나게 되고, 그를 위해 남편 곁을 떠납니다. 이러한 선택에서 우리는 아니타가 사회의 규범에 순종하지 않는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세페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사르데냐 왕국(현 이탈리아)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아니타 가리발디: 브라질과 이탈리아를 잇는  두 세계의 영웅

리우데자네이루에 머문 후 그는 다비드 카나바루(David Canabarro, 1796~1867)의 부대에 합류하여 1839년 7월 20일 라구나를 점령했습니다. 당시 배가 침몰한 탓에 그는 며칠 동안 배 위에서 망원경으로 도시를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륙한 그는 현지의 한 사람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의 집에 초대받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소개받은 사람은 조카였는데, 하필 그 조카가 바로 배 위에서 보았던 그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훗날 가리발디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생생하게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가리발디 곁에서 아니타는 제국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1839년 배가 제국 해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카빈총으로 몸을 방어하며 첫 전투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니타 가리발디는 행군 중 부대 열을 지휘하는 일부터 부상자를 돌볼 야전병원 설치까지 전방위적으로 활약했으며, 전투에서도 직접 무기를 들고 싸웠습니다.

파호스파가 산타카타리나에서 패배하자 부부는 당시 유일하게 이혼이 가능했고 리우그란지두술 공화국을 승인한 나라인 우루과이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900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몬테비데오(Montevideo)에 정착한 두 사람은 1842년 결혼식을 올린 뒤 세 명의 자녀를 더 낳았습니다. 부부는 1841년부터 1848년까지 우루과이 수도에서 생활했습니다.

가리발디는 우루과이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망명 동포들로 구성된 이탈리아 군단(Italian Legion)을 이끌었습니다. 이 부대는 빨간 셔츠를 입은 것으로 유명해졌는데, 이것이 훗날 '붉은 셔츠'로 불리게 된 유래입니다.

주세페 가리발디는 조국 이탈리아와 그곳에서 벌어진 투쟁을 결코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세 자녀를 니차(Nizza, 현 프랑스 니스)에 먼저 보내 귀환 준비를 하도록 한 뒤, 1849년 로마 의원으로 선출되며 다시 이탈리아 반도 통일 투쟁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아니타는 집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군에 맞서 남편 곁에서 함께 싸우기 위해 그를 찾아갑니다. 1849년 가리발디의 부대는 프랑스군에게 로마에서 패배했고, 주세페와 아니타는 후퇴합니다. 아니타는 병든 몸으로도 남편 곁을 떠나기를 거부하며 끝까지 그와 함께했습니다.

아니타 가리발디는 1849년,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무려 일곱 번 매장되었는데, 그중 네 번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주세페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통일 이탈리아의 건국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아니타와 주세페 가리발디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중 셋은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니타 가리발디의 유해는 현재 193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헌정한 로마의 기념물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아니타 가리발디의 삶은 섭정기(Regency Period, 1831~1840)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시기 브라질의 여러 주들은 강력한 중앙 권력의 부재를 틈타 브라질 제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구했습니다.

남부의 산타카타리나와 리우그란지두술은 파호스 전쟁(War of the Farrapos)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두 개의 독립 국가가 잠시 세워졌습니다. 바로 리우그란지두술 공화국(1838~1845)과 줄리아나 공화국(1839)입니다.

한편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이탈리아 통일로 이어질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왕국이 얽힌 모자이크 같은 곳으로, 북부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하고 있었으며 교황령(Papal States)은 프랑스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니타 가리발디: 브라질과 이탈리아를 잇는  두 세계의 영웅

이런 상황 속에서 선원 주세페 가리발디처럼 반도 통일을 위해 사보이 왕조가 다스리던 피에몬테(Piedmont) 부대에 합류한 자원병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국왕과 갈등을 빚어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결국 그는 남미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공화파와 함께 브라질 제국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훗날 '두 세계의 영웅(Heroine of Two Worlds)'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젊은 아나 마리아, 즉 아니타 가리발디와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타 가리발디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

  • 라구나에 있는 아니타 가리발디의 옛집은 1978년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이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 아니타 가리발디 시(Anita Garibaldi)는 1961년 시로 승격되었는데, 이 지명은 1842년 아니타가 그곳을 지나갔다는 사실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이곳은 부대의 휴식처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 아니타 가리발디는 1999년 삼바 학교 비라도우로(Viradouro)의 행사 주제 '아니타 가리발디 – 일곱 가지 매력의 영웅(A Heroína das Sete Magias)'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 그녀의 생애는 여러 이탈리아·브라질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대표작으로는 2013년 알베르토 론달리(Alberto Rondalli) 감독의 '아니타와 가리발디(Anita e Garibaldi)'가 있습니다.
  • 브라질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덕분에 아니타 가리발디의 이름은 브라질 전역의 대로, 거리, 학교에 붙여져 있습니다. 2012년에는 라구나 시와 육지를 연결하는 아니타 가리발디 대교가 이마루이 호(Lagoa do Imaruí) 위에 개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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