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냐 카를로타 호아퀴나 데 부르봉(Dona Carlota Joaquina de Bourbón)은 1775년 4월 25일 스페인의 인판타(공주)로 태어났으며,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언어, 역사, 궁정 예법, 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타고난 비범한 에너지 덕분에 그녀는 평생 동안 포르투갈, 브라질, 스페인의 정치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의 아내이자, 브라질 초대 황제 페드루 1세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정략 결혼
포르투갈 왕자와 스페인 인판타의 결혼은 두 왕국을 하나로 묶으려는 외교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열강 사이에서 결혼 동맹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양국 모두에게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10세의 어린 나이에 카를로타 호아퀴나는 주앙과의 결혼을 위해 마드리드를 떠났습니다. 이와 동시에 주앙의 누이동생인 마리아 아나 비토리아는 스페인의 인판테 가브리엘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 결혼에서는 아홉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중 여덟 명이 성년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시작된 이 결혼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카를로타 호아퀴나와 주앙 6세는 의례상의 의무만을 수행하며 사실상 별거에 가까운 부부 생활을 이어갔고, 자녀들은 가족적·정치적 긴장이 감도는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1788년 마리아 1세의 장남이자 브라질 왕자였던 조제가 사망하면서 주앙이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로 추대되었습니다. 이 무렵 마리아 여왕의 정신 건강은 이미 심각한 이상 신호를 보이고 있었고, 주앙은 1792년부터 방대한 해외 제국의 섭정직을 맡게 됩니다.
한편 카를로타 호아퀴나는 역사적으로 '못생긴 인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키가 작고 다리를 절뚝거렸으며, 어린 시절 앓은 천연두로 인해 얼굴에 흉터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역사적 배경: 왕실의 브라질 이주
같은 시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국경을 넘어 제국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페인 국왕과 협상하여 스페인 영토를 통과해 포르투갈을 침공할 권한을 확보했고, 1807년 실제로 침공을 감행합니다.
영국 함대의 보호 아래 포르투갈 왕실은 1807년 11월 30일 리스본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1808년 1월 바이아의 살바도르에 도착했고, 같은 해 3월에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안착하여 1821년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포르투갈 궁정이 브라질로 옮겨지자, 카를로타 호아퀴나는 딸들과 함께 보타포구(Botafogo) 지역의 개인 저택에 정착한 반면, 주앙은 상크리스토방 궁전을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필요할 때에만 만나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흥미롭게도 카를로타가 거주하던 보타포구 저택 자리에는 오늘날까지 노사 세뇨라 다 피에다데(Nossa Senhora da Piedade) 예배당이 남아 있습니다.
카를로타 호아퀴나와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야망
어린 시절 스페인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카를로타 호아퀴나는 스페인 왕가의 친척들과 끊임없이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오라비 페르난도 7세 국왕이 나폴레옹에게 체포되자, 그녀는 스스로를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의 섭정으로 선포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를 위해 그녀는 라플라타 부왕령, 페루 부왕령 등 아메리카 각지의 정부 위원회(훈타)와 밀접한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또한 제독 시드니 스미스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계획에 동조할 지지자들을 포섭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음모를 알게 된 주앙은 영국 정부에 해당 제독의 교체를 요청하며 그녀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녀는 또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스페인 특사인 호세 마누엘 데 고예네체 장군을 접견하기도 했습니다.
이 장군은 카를로타 호아퀴나의 서신들을 아메리카 식민지와 세비야 훈타에 전달했습니다. 서신 속에서 그녀는 스페인 국왕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자신이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섭정이 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담한 계획은 아메리카에서도 스페인 본토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페르난도 7세가 수감 중이라 하더라도 오직 그의 섭정만을 인정한다는 입장이 분명하게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과의 정략적 동맹
정치적 마찰에도 불구하고, 카를로타 호아퀴나는 딸들과 오라비들 간의 혼인을 주선하며 정치 무대에 계속 관여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이자벨은 숙부인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비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딸 마리아 프란시스카 데 아시스(1800~1834)는 카를로타의 오라비인 인판테 카를로스와 결혼했고, 그녀가 사망한 후에는 조카인 마리아 테레자(1793~1874)가 그와 재혼했습니다.
당시에는 교황의 특별 허가가 있으면 숙부와 조카 사이의 근친 결혼도 가능했다는 점이 이러한 정략 혼인의 배경에 있습니다.
포르투갈 귀환과 말년

왕실이 브라질에 오래 머무는 것에 불만을 품은 포르투 시민들은 일련의 시위를 벌였고, 이는 결국 1820년 포르투 자유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혁명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은 주앙 6세와 궁정의 귀환, 그리고 코르테스(입헌 의회)가 작성한 헌법에 대한 군주의 승인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한편 아들 페드루는 브라질에 남았고, 1822년 9월 7일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브라질 독립을 선포합니다.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에 카를로타 호아퀴나는 크게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 후 대륙의 정치 상황은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포르투갈에 도착한 그녀는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 서명을 거부했고, 주앙 6세에게도 같은 입장을 취하라고 강요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아들 미겔을 통해 권력 회복의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카를로타 호아퀴나가 장남 페드루보다 차남 미겔을 훨씬 더 아꼈다는 것은 주변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미겔이 친아버지인 주앙 6세에 맞서 음모를 꾸미는 빌라프랑카다(Vilafrancada)와 아브릴다(Abrilada) 사건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계속해서 자신의 정권에 맞서 음모를 꾸밀 것을 우려한 주앙 6세는 그녀를 먼저 라말량 농장(Quinta do Ramalhão)으로, 이후에는 켈루즈 궁전(Palácio de Queluz)으로 보내 사실상 유폐시켰습니다. 그곳에서 카를로타 호아퀴나는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다가 1830년 1월 7일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들
- 카를로타 호아퀴나의 세 자녀가 왕좌에 올랐습니다. 페드루 1세는 브라질 황제로, 이후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로도 즉위했습니다. 미겔은 1828년부터 1834년까지 포르투갈의 왕이었으나, 형인 페드루와의 내전에서 패배했습니다. 마리아 이자벨은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 딸 이자벨 마리아는 아버지 주앙 6세 사후, 미겔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약 2년간 포르투갈의 섭정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최근에는 카를로타 호아퀴나의 정치적 활동을 중심으로 그녀의 역사적 인물상을 새롭게 재조명하려는 학계의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