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산투스 후작부인 도미틸라: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가 사랑한 여인

도미틸라 드 카스트루 칸투 이 멜류(Domitila de Castro Canto e Mello), 즉 산투스 후작부인(Marquesa de Santos)은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정부였습니다.

산투스 후작부인 도미틸라: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가 사랑한 여인

성 이자벨 훈장의 리본을 두른 산투스 후작부인의 초상

생애

도미틸라는 1797년 상파울루에서 그 도시에서 손꼽히는 전통 있는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당시의 관습대로 그녀는 15세에 펠리시우 핀투 코엘류 드 멘동사 중위와 결혼하여 남편의 부대가 주둔하던 빌라리카(현 오루프레투)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이었습니다.

도미틸라는 당시 사회적 통념에 과감히 반하여 두 자녀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부부는 1818년 재결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남편에게 암살 위협까지 받은 끝에 도미틸라는 그를 완전히 떠나 할머니의 집으로 물러났습니다.

1822년 8월 29일, 상파울루의 유력 가문들을 방문하던 페드루는 도미틸라를 처음 만났습니다. 며칠 후 그는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분리를 선언했지만, 도미틸라를 잊지 못했습니다. 불과 몇 달 만에 도미틸라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자리를 잡았고, 두 사람의 로맨스는 5년간 이어졌습니다.

브라질 궁정에서의 영향력

페드루 1세는 상파울루 출신 여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고, 상크리스토방 궁 근처에 정부를 위한 저택을 마련하고 개축했습니다. 현재 그 건물은 제1제정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국 권력이 공고해지자 도미틸라는 1824년 헌법을 통해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려 했던 조제 보나파시우 형제들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을 자신의 저택으로 끌어들이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페드루 1세와 함께 지낸 기간 동안 도미틸라와 그녀의 가족은 귀족 작위를 받았습니다.

1825년 그녀는 황후 레오폴디나의 시녀궁내관으로 임명되어 황후와 매일 마주하는 처지가 되었고, 산투스 자작부인 작위와 대귀족 특권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산투스 후작부인'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카스트루 자작 작위를 받았고, 여동생 부부는 소로카바 남작이 되었습니다. 보타포구의 저택에 들어선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뿐 아니라 그녀의 여동생과도 밀회를 가졌습니다. 소로카바 남작부인은 황제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황제는 유언장에서 이 아이를 인정했습니다. 분노한 도미틸라는 친여동생 살해를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페드루 1세의 행보는 브라질 국민과 유럽 각국 궁정을 경악시켰습니다. 1826년 황후 레오폴디나의 죽음은 그의 인기 저하에 불을 지폈습니다. 일각에서는 도미틸라가 황후를 독살했다는 비난까지 나왔으나, 이는 근거 없는 의혹에 불과합니다.

산투스 후작부인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페드루 1세는 재혼 문제에서는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는 레오폴디나 황후 사후 귀족 혈통의 신부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택된 젊은 공주 아멜리아 폰 로이히텐베르크는 결혼이 성사되기 전에 후작부인과 그녀의 자녀들이 궁정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페드루 1세와의 결별 이후의 삶

도미틸라와 페드루 1세 사이에서는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중 두 명이 성인까지 살아남았습니다.

  • 이자벨 마리아 지 알칸타라 브라질레이라, 고이아스 공작부인
  • 마리아 이자벨 2세 지 알칸타라 부르봉, 이구아수 백작부인

첫째는 페드루 1세가 브라질 제위를 내려놓을 때 유럽으로 떠났고, 둘째는 산투스 후작부인 곁에 남았습니다.

다시 한번 당시 관습에 반해, 1833년 도미틸라는 육군 준장 라파엘 토비아스 아기아르와 동거하며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토비아스 아기아르는 상파울루의 농장주이자 정치인으로, 상파울루 주지사를 두 차례 역임한 인물이었습니다. 부부는 1842년에야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카르무 거리에 위치한 아름다운 저택에 자리 잡은 후작부인은 화려한 무도회와 파티를 열며 사회적 삶을 재건했고, 상파울루 상류 사회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비아스 아기아르는 1842년 자유당 반란에 가담했다가 리우데자네이루의 라제 요새에 수감되었습니다. 산투스 후작부인은 병든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수도로 향해 어린 황제 페드루 2세에게 직접 허가를 청원했습니다. 이 간절한 모습에 감동한 황제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죽음

산투스 후작부인 도미틸라: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가 사랑한 여인

손주들과 함께한 산투스 후작부인

토비아스 지 아기아르는 1857년 세상을 떠났고, 도미틸라는 이미 성인이 된 다섯 자녀를 둔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산투스 후작부인은 남은 10년의 생애를 자선 활동에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상파울루 법학대학 학생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병든 이들을 찾아 위로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 사상을 옹호하고 상파울루의 선거 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녀는 1867년 11월 3일 상파울루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콘솔라상 묘지에 딸인 이구아수 백작부인 곁에 잠들어 있습니다.

후작부인이 살았던 저택은 현재 상파울루 시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화 및 다큐멘터리

  • 『독립 아니면 죽음』 – 감독: 카를루스 코임브라, 1972
  • 『산투스 후작부인』 – 감독: 아리 코즐로프, 1984
  • 『산투스 후작부인 – 진실된 이야기』 – 감독: 디마스 올리베이라 주니오르, 루이스 필리프 하라진,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