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브라질
브라질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1944년 9월 16일 시작되어 약 7개월간 지속되었으며, 그 목표는 이탈리아 해방이었습니다.
브라질은 제훌리우 바르가스 대통령이 유지하던 중립 노선을 미국 정부의 압박으로 접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1937년까지 브라질은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다음 해부터 이 관계는 깨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42년, 브라질이 추축국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면서였습니다.
이후 독일군의 공격으로 브라질 연안에서 19척의 브라질 선박이 피해를 입었고, 약 5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브라질의 참전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제훌리우 바르가스 정부는 연합국 지원에 나섰습니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정부는 실질적인 병력 파견을 추진했습니다.
바르가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서 군 현대화 지원과 국내 제철소 건설 자금 대출을 이끌어냈습니다.
그 결과물이 볼타레돈다(RJ)에 위치한 CSN(브라질 국영제철회사, Companhia Siderúrgica Nacional)입니다.
그 대가로 브라질은 히우그란지두노르치주의 땅을 미국에 제공해 군사 기지 설치를 허용했습니다. 이곳은 유럽으로 향하는 항공기의 출발 거점이 되었으며, '승리의 트램펄린(Trampolim da Vitória)'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비판자들은 브라질의 참전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그들은 "뱀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FEB(브라질 원정군)가 배에 오르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라고 조롱했습니다. 이 때문에 FEB의 상징은 파이프를 문 뱀이 되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는 1942년 8월 31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브라질 육군은 소규모 부대였기 때문에 의사, 간호사, 변호사 등 징집병과 예비역을 추가로 소집해야 했습니다.
FEB(브라질 원정군) 창설 법령은 1943년 8월 9일 서명되었습니다. FEB는 미군에 합류해 이탈리아에서 미군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FEB 병력은 전쟁에만 전담 투입된 25,445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브라질 전역에서 45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3,00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브라질 파병 부대는 여덟 개 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 제1보병연대 – 리우데자네이루
- 제6보병연대 – 상파울루 카사파바
- 제11보병연대 – 미나스제라이스 상주앙델레이
- 포병 4개 그룹
- 제9공병대대 – 마투그로수두술 아키다우아나
- 제1정찰중대
- 제1위생(의무)대대
- 특수부대 및 간호사 67명
새로 창설된 브라질 공군(FAB)도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센타 아 푸아(Senta a Pua)'라는 구호 아래 주력 부대는 P47 선더볼트 전투기를 장비한 제1전투항공단(GAC)이었습니다.
이 부대는 374명의 군인과 28대의 항공기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16대가 격추되고 5명의 조종사가 전사, 5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브라질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활동
브라질 병사들은 1944년 7월 16일 이탈리아에 도착했습니다. 미군과 함께 싸운 브라질군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저항하던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1944년 9월, 브라질 병사들은 마사로자, 카마이오레, 몬테프라노를 점령했습니다. 1945년 초에는 몬테카스텔루, 카스텔누오보, 몬테제 등 전략 요충지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전쟁은 1945년 5월에 종결되었습니다.
전쟁 중 전사한 454명의 병사 유해는 1960년까지 이탈리아 피스토이아 묘지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유해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위치한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 국립기념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쟁의 종식
독일의 항복 문서 조인 이후 FEB는 곧바로 이탈리아에서 동원 해제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질의 유럽 파병은 제훌리우 바르가스 정부의 내부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브라질 병사들은 독재와 싸우러 갔지만, 정작 자신들은 반민주적 체제 아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장에서 경험을 쌓은 병사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까 두려워한 바르가스는 군 부대를 신속히 해산시켰습니다.
이후 세대들은 브라질 병사들의 노력을 조롱하며, 그들이 독일군에게 이미 '잊혀진'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싸웠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학자들이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며 브라질 병사들에게 역사 속 당당한 자리를 되찾아주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들
최소 한 명의 브라질인이 나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오턴 코헤이아 네투 소장은 1945년 3월 26일 이탈리아 카사르사 다리 공격 작전에서 전투기가 격추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그는 4월 29일까지 독일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브라질 병사들은 아펜니노 산맥에서 영하 20도의 혹한도 견뎌야 했습니다.
조종사 알베르투 마르칭스 토레스는 브라질 항공 역사상 최고의 파일럿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100번의 전투 임무와 브라질 연안에서 76번의 순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브라질인들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는 거리와 광장 이름을 '브라질'로 명명했습니다. 피스토이아 시에는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선린 정책(굿 네이버 정책)
- 제2차 세계대전
- 제2차 세계대전 관련 문제
- 바르가스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