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1930년 혁명: 브라질 제1공화국의 종말과 게툴리우 바르가스의 등장

1930년 혁명은 1930년 10월 24일 워싱턴 루이스(Washington Luís) 대통령을 축출한 무력 행동, 즉 쿠데타를 가리킵니다.

이 운동은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 파라이바(Paraíba), 히우그란지두술(Rio Grande do Sul) 세 주가 주도하여 조직되었으며, 선거 부정을 이유로 당선자 줄리우 프레스치스(Júlio Prestes)의 취임을 저지했습니다.

여기에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과 파라이바 정치인 주앙 페소아(João Pessoa) 암살 사건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사적 배경

1930년까지 브라질 정치는 미나스제라이스와 상파울루의 과두세력이 부정선거를 통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국가는 농산물 수출 중심의 경제 체제에 묶여 있었습니다.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의 엘리트들은 공화국 대통령직을 번갈아 차지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를 선출했습니다. 이 정치 체제는 '커피 밀크 정책(Café com Leite)' 또는 '주지사 정책(Política dos Governadores)'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 체제는 다른 브라질 주들이 성장하며 정치 무대에서 더 큰 발언권을 요구하기 시작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한편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은 브라질 경제를 강타해 실업과 재정난을 초래했습니다.

브라질이 커피 단일작물 경제 국가였던 탓에 커피 수출이 급감하면서 위기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 경제 위기는 워싱턴 루이스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만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동시에 과두정을 타도하고 브라질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하급 장교들, 이른바 '테넨티스모(Tenentismo)' 세력의 불만도 팽배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코파카바나 요새 반란(Revolta do Forte de Copacabana)이나 1924년 상파울루 반란(Revolta Paulista) 등을 통해 브라질 정치 현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1930년 대통령 선거

1929년 초, 워싱턴 루이스는 상파울루 주지사 줄리우 프레스치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이 결정은 17개 주 지사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프레스치스의 지명은 미나스와 상파울루가 번갈아 권력을 차지하던 관행을 깬 것이었고, 그 결과 미나스제라이스, 히우그란지두술, 파라이바는 프레스치스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1930년 혁명: 브라질 제1공화국의 종말과 게툴리우 바르가스의 등장

이들 주는 야권 정치인들과 손잡고 '자유동맹(Aliança Liberal)'을 결성했습니다. 이 진영의 정후보는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 게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였고, 부후보는 파라이바 주지사 주앙 페소아였습니다.

모든 정세는 프레스치스의 승리를 가리키는 듯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1930년 3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프레스치스는 1,091,709표를 얻어 742,794표를 득표한 바르가스를 큰 격차로 누르고 당선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발표되자 자유동맹은 선거 부정을 주장하며 선거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앙 페소아 암살 사건

얼마 지나지 않은 1930년 7월, 주앙 페소아가 헤시피(Recife)에서 변호사 주앙 단타스(João Dantas, 1888~1930)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 범행은 개인적 사정과 파라이바 지역 정치와 얽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통령 후보의 죽음은 곧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1930년 혁명: 브라질 제1공화국의 종말과 게툴리우 바르가스의 등장

분노가 온 나라를 휩쓸었음에도 지지 기반을 잃은 워싱턴 루이스 대통령은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10월 3일, 남부에서는 게툴리우 바르가스가, 북부에서는 주아레스 타보라(Juarez Távora, 1898~1975)가 이끄는 군대가 리우데자네이루로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에 도착하자 육·해·공군 장관인 타수 프라고주(Tasso Fragoso), 메나 바헤뚜(Mena Barreto), 이자이아스 데 노호냐(Isaías de Noronha)로 구성된 '정부위원회(Junta Governativa)'가 수립되었습니다.

군부 앞에서 워싱턴 루이스는 "감옥으로 가거나 죽음이 아니면 직위를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즉시 정부위원회는 그를 체포해 코파카바나 요새로 이송했고, 그는 11월까지 그곳에 머문 뒤 유럽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게툴리우 바르가스는 광범위한 권한을 지닌 임시정부 수반으로 부상하여 1891년 헌법을 폐지하고 법령으로 통치했습니다. 아울러 자신의 동맹들을 각 주의 개입관(interventor, 사실상 주지사)으로 임명했습니다.

바르가스 임시정부

바르가스의 동맹들은 새 지도자가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실시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이 문제는 계속해서 연기되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공산당, 국민해방동맹(ANL), 상파울루 세력 등 여러 정치 세력이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상파울루에서는 대통령 선거 실시와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중앙정부의 거부와 경찰 탄압의 강화에 직면한 상파울루 주는 마침내 정부에 맞서 무장항쟁을 일으켰고, 이 사건은 '1932년 입헌혁명(Constitucionalista)'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1930년 혁명'이라는 명칭은 그 참여자들이 스스로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것은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입니다.

혁명은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며, 권력을 장악한 뒤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실현합니다.

반면 쿠데타는 헌법에 따라 선출되었거나 그 직위에 있는 정치인을 폭력적으로 축출하는 행위입니다.

1930년의 사건들은 본질적으로 엘리트들 간의 권력 다툼이었으며,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브라질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

  • 워싱턴 루이스는 1947년에야 브라질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줄리우 프레스치스는 영국 영사관에 망명을 요청한 뒤 1934년에 귀국했습니다.
  • 게툴리우 바르가스의 전직 장관 세 명과 1930년 혁명에 참여한 장교 세 명이 훗날 공화국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장관 출신은 에우리쿠 가스파르 두트라(Eurico Gaspar Dutra), 주앙 굴라르트(João Goulart), 탕크레두 네베스(Tancredo Neves)이며, 군인 출신은 카스텔루 브랑쿠(Castelo Branco), 에밀리우 메디시(Emílio Medici), 에르네스투 가이젤(Ernesto Geisel)입니다.
  • 1930년 선거에서 게툴리우 바르가스는 고향 히우그란지두술에서 거의 100%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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