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총파업이란?
1917년 총파업(General Strike of 1917)은 6월부터 7월까지 두 달에 걸쳐 브라질 상파울루의 노동자와 상인들이 주도한 운동입니다.
노동자들은 더 나은 근로 조건과 임금 인상을 요구했으며, 5일간의 총파업 끝에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1910년대 상파울루 한 공장의 모습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 스페인,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노동자 계급은 사용자에게 인간다운 근로 조건을 보장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항상 평화롭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9년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비극의 주간(Tragic Week)'에서는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이 정부에 의해 학살당하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1917년, 세계는 유럽 각국에 경제적·사회적 피해를 안기고 있던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편 브라질은 식량 부족으로 인한 경제 불안정과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브라질 최초의 공장들이 문을 열면서 도시에서 더 나은 임금과 삶의 기회를 찾으려는 농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공장의 근로 조건은 최악이었습니다. 노동법이 전무했고, 하루 근무 시간은 무려 16시간에 달했으며, 여성과 아이들도 무거운 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노동 분쟁은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결되곤 했습니다.
브라질 노동운동의 조직화
제1공화국 시기 노동자들은 주 단위 노조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전국 차원의 유일한 조직은 1906년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 히우그란지두술, 페르남부쿠, 바이아의 노조들이 발기하여 설립한 '브라질 노동자 연맹'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상부상조회'와 '상호 부조 은행' 등 사회적 성격을 지닌 단체들이 활동했으며, 이들은 회원들에게 의료 지원과 산재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상파울루 공장에서 일하러 온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 이민자들이 노동자 신문을 통해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들은 신문을 통해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결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917년 7월 9일자 아 가제타(A Gazeta) 신문 1면, 파업 소식을 전하다
파업의 시작
파업은 상파울루 무카(Mooca) 지구에서 2,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던 크레스피(Crespi) 공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근무 시간 단축, 아동 노동 금지, 여성 야간 노동 금지를 요구했습니다.
이 운동은 인근 다른 공장으로 번지며 더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언론인 에드가르 로엔로트(Edgar Leuenroth)가 전파한 아나키즘 사상에 고무된 노동자들은 동네와 공공 광장에서 첫 집회를 열었습니다.
6월 내내 여러 공장이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7월 8일에는 아나키스트들의 제안으로 파업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다음 날인 7월 9일, 경찰이 스페인 출신 구두공 호세 마르티네스(José Martínez)를 살해하면서 파업 참여자들 사이에 격렬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7월 12일, 총파업이 선포되었습니다. 상파울루는 공장과 상점, 교통이 모두 멈춘 채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강경한 경찰 탄압에 직면하자 노동자들은 사용자와의 직접 협상을 거부했고, 언론인들이 중개위원회를 구성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치열한 협상 끝에 노동자들은 20% 임금 인상, 결사의 자유, 파업 참여자 해고 금지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7월 16일, 콩코르디아 광장(Largo da Concórdia)에서 열린 집회를 통해 브라질 최초의 총파업은 막을 내렸습니다.
파업의 결과와 의의
1917년 총파업은 브라질 도시 노동자들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주요 의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브라질 노동자들이 계급 의식을 갖게 되었다.
- 동네 단위 계급 동맹에서 최초의 노조들이 발전했다.
- 브라질에서 좌파 사상이 확산되고 강화되었다.
- 사회 갈등은 경찰력이 아니라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