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원(patronage)과 군주·예술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지니지만, 르네상스기 프랑스, 즉 프랑수아 1세의 시대가 그 가장 완벽한 사례로 자주 꼽힌다. 로아르 계곡의 성들과 당대 최고 예술가들에 대한 의뢰는 발루아 가문을 이상적인 예술 후원 군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물을 수 있다. 그 이후, 더 위대한 후원자 루이 14세가 등장하기까지 프랑스 왕가와 예술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앙리 2세와 예술
1547년 프랑수아 1세의 죽음은 궁정, 그리고 그 너머에서 예술의 위축을 의미했을까? 아들 앙리 2세는 즉위하자마자 다른 관심사와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아버지의 과도한 지출로 타격을 입은 왕실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안 드 몽모랑시를 다시 불러들였고, 후원은 더 이상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궁정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디안 드 푸아티에 덕분에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권력은 여전히 시인과 예술가들, 특히 건축가들을 끌어당겼다. 피에르 레스코(1556년 완공된 루브르궁), 앙드루에 뒤 세르소, 필리베르 들로름(샤토 도네와 셰노소 회랑)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1550년 루앙 입성 행사에서 보듯 군주는 여전히 화려하게 연출되곤 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 시절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시대적 상황, 특히 곧 닥쳐올 종교전쟁이 크게 작용했다.
종교전쟁과 카트린 드 메디시스
1560년대 프랑스에 폭발한 위기의 시기에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역할은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플로렌스 출신이라는 배경 탓일까, 섭정왕비는 내전 상황에서 예술이 지닌 특별한 힘을 믿었다. 자크 아미오 같은 인문학자들이 전면에 내세워졌고, 왕국 내 조화를 되찾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또한 위대한 수집가였다. 그녀 사후인 1589년에 작성된 뒤즈에쿠 거리 저택 목록에 따르면, 기록된 작품들의 가치는 50만 크라운을 넘었다고 한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영향 아래 생드니 바실리카의 발루아 가 묘역 공사도 계속 진행되었으며, 르 프리마티스가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클루에 형제나 앙투안 카롱(내전을 암시하는 <삼두정의 학살>) 같은 화가들이 여전히 활동했고, 몽테뉴나 롱사르 같은 문필가들도 보호를 받았다.
더욱이 1570년에는 샤를 9세 국왕과 장 앙투안 드 바이프가 플로렌스의 모델을 본떠 '시와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이는 프랑스 최초의 아카데미였다.
앙리 3세와 예술
샤를 9세의 뒤를 이은 앙리 3세의 정치적 상황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칼뱅파와 '불평분자(Malcontents)'에 맞서야 했고, 이러한 상황은 예술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본격적인 후원 정책을 펼 만큼 재정적 여유는 없었지만, 앙리 3세는 자크 아미오의 영향 아래 통치에 있어 문학과 예술의 중요성을 확신했다. 그래서 예술가들에게 의뢰해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검소하고 독실했으며 가톨릭 신앙이 깊은 군주로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였다. 제르맹 필롱이나 장 드 쿠르 등이 이 작업에 동참했다.
국왕은 또한 문인·시인 평의회를 구성해 아카데미를 지원했다. 여기에는 장 앙투안 드 바이프, 필립 데포르트, 장 도라 등의 문인과 클로드 르죈, 자크 모뎃 같은 음악가들이 포함되었다. 이 평의회는 국왕이 직접 제안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재정 부족은 결국 그들에게도 발목을 잡았고, 그들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실제로 정치적 난국이 깊어지면서 앙리 3세의 이미지 통제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더 심각한 것은 그의 이미지가 결국 신성성을 잃었다는 점이다. 리그파는 판화에서 그를 악마화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의 암살은 이러한 지위 변화가 가져온 귀결이었다.
건축하는 군주, 앙리 4세
1589년 즉위한 부르봉가의 군주 앙리 4세는 주로 내전의 종식과 평화 회복에 몰두했다. 그는 1598년이 되어서야 예술에 눈을 돌렸다.
앙리 4세는 무엇보다 '건축하는 군주'로 이름을 남겼으며, 특히 수도에서 두드러졌다. 투생 뒤브뢰유와 자크 브뤼넬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퐁텐블로와 생제르망앙레의 공사를 재개한 뒤, 파리를 현대적 도시로 만드는 데 착수했다. 퐁뇌프 다리를 시작으로 로얄 광장(현 보주 광장), 도팜 광장, 생루이 병원이 세워졌고, 프랑스 문과 프랑스 광장이 계획되었다. 또한 튈르리 궁에 플로르 파빌리옹을 추가하고, '왕립 회랑'을 갖춘 익관을 통해 루브르궁과 연결했다.
루이 13세에서 루이 14세까지
1610년 앙리 4세 사망 이후의 시기는 흔히 루이 14세 시대의 폭발적 발전 이전의 쇠퇴, 혹은 적어도 '정체기'로 여겨진다. 국제 정세가 다시금, 특히 재정에 부담을 안겼다. 그러나 예술이 그토록 쇠약했던 것만은 아니다.
루이 14세 이전 세 사람이 예술에 관심을 이어갔는데, 정작 루이 13세는 뒷전이었다. 처음에는 마리 드 메디시스와 리슐리외, 그다음에는 마자랭이었다. 이 시기 바로크 예술이 발전했는데, 이는 가톨릭 개혁의 결과로 신앙을 돕는 예술이 강조된 데 따른 것이다. 신자들은 하느님께 바쳐진 건축물 앞에서 감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대표 결과물이 1635년 리슐리외가 결정한 소르본 성당이다. 추기경은 같은 해 프랑스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필립 드 샹페뉴와 자크 스텔라 같은 화가들을 지원하며 당대 최대의 수집가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마리 드 메디시스는 남편 앙리 4세 사후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그가 시작한 파리의 사업들을 이어갔다. 플로렌스 우피치 미술관의 영향을 받은 루브르 대회랑이 그 예이다. 이어 1615년부터 1622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피티 궁을 본떠 뤽상부르 궁이 지어졌다. 마침내 섭정은 루벤스(훗날 리슐리외에 의해 밀려남) 같은 거장들을 곁에 두었다.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사이의 과도기 인물인 마자랭 역시 뛰어난 수집가(4만 권을 자랑하는 유명한 마자랭 도서관 포함)이자 예술의 보호자였다. 그는 1647년 프랑스에 이탈리아 오페라를 도입했고, 이듬해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 설립을 도왔다. 훗날 태양왕이 될 루이 14세에 대한 그의 영향은 뚜렷했다. 예술에 대한 취향뿐 아니라, 권력 행사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인식 면에서도 그러했다.
결국 군주와 예술의 관계는 프랑수아 1세와 루이 14세라는 두 위대한 후원자 사이에서도, 긴장된 정세와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도 중요하게 유지되었다. 군주들이 직접 예술을 보호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영향을 준 왕족들 역시 예술의 든든한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 L. 벨리(L. Bély), 『군주들의 사회(16~18세기)』, 파야르, 1999.
- H. 우르셀, J. 프리츠, 『앙리 2세와 예술: 루브르 학교·국립 르네상스 박물관(에쿠앙) 국제 학술회의록』, 프랑스 문헌관, 2003.
- J-F. 마이야르, I. 코니우, G. 푸아리에, 『예술·과학·문학의 후원자 앙리 3세』, 파리-소르본 대학교 출판부, 2006.
- J-F. 뒤보, 『메디치 가의 마리, 베일 걷힌 왕비』, 파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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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구베르, 『마자랭』, 파야르,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