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프랑수아 1세를 둘러싼 여인들: 사랑과 권력의 드라마

어머니, 누이, 아내, 정부(情婦)들… 한 술탄이 하렘을 거느리듯 화려한 궁정에서 프랑수아 1세를 향한 숭배를 바치며 평생을 바친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는 운명의 총애를 받는 응석받이 아이처럼 그녀들의 헌신을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였다. 사부아의 루이즈, 나바르의 마르그리트, 피슬뢰의 안, 프랑스의 클로드,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수아즈 드 샤토브리앙(푸아)까지. 이들은 모두 화려하고 격동적인 치세 속에서 빛났던 비범한 여인들이었다.

프랑수아 1세와 브르타뉴 문제

뛰어난 신장의 소유자였던 프랑수아 1세는 세련되고 총명하면서도 표피적인 면모를 지녔으며, 예술을 사랑하고 승마에 능했으며 사치와 특히 아름다운 여인을 즐겼다. 그의 주변에는 늘 젊고 매력적인 무리가 맴돌았고, 그는 이들을 애정을 담아 "작은 무리(la petite bande)"라 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리냥 전투(Bataille de Marignan)에서 전공을 세우며 전사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안 드 브르타뉴의 딸 클로드와 결혼했음에도, 한 가지 문제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브르타뉴가 언제든 프랑스에서 분리될 수 있는 자유 국가로 남아 있다는 협약 때문이었다. 이는 그에게 수많은 부유한 영지를 잃게 할 위험이 있었다.

프랑수아 1세를 둘러싼 여인들: 사랑과 권력의 드라마
프랑수아즈 드 푸아, 샤토브리앙 부인

이 브르타뉴 영지의 대부분은 장 드 라발 영주에게 속해 있었다. 프랑수아는 그를 서둘러 궁정으로 불렀고, 안 드 브르타뉴의 사촌이자 그의 매력적인 아내도 함께 오길 바랐다. 그녀가 바로 1475년생 프랑수아즈 드 푸아(Françoise de Foix)였다. 11세에 부유한 라발-샤토브리앙 영주와 약혼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당찬 성품, 고운 피부, 조화로운 체구, 그리고 아름다운 흑발로 빼어난 미모를 예고했다. 장은 1509년 그녀와 결혼해 브르타뉴의 영지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한 삶을 누렸다. 프랑수아 1세가 프랑수아즈의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젊은 왕은 명성이 궁정에까지 이른 이 미녀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왕의 여성 편력을 잘 아는 장 드 라발은 아내의 "사나운 성정"을 핑계로 혼자만 궁정에 나타났다. 이 거절은 왕의 호기심만 자극했고, 거듭된 명령 끝에 프랑수아즈는 궁정으로 오게 되었다. 장은 최후의 수단으로 '반지 전략'을 썼다. 아내에게 궁정으로 가라는 편지와 함께 반지를 동봉하며, "편지에 반지가 들어 있으면 그 내용을 무시하라"는 밀약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왕의 시종이 편지를 가로채 반지를 빼돌리는 바람에 계략은 수포로 돌아갔고, 프랑수아즈는 왕 앞에 서게 되었다. 왕은 단숨에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왕의 침실에 드는 것엔 많은 이점이 있지."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프랑수아는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였고, 그녀는 곧 왕의 정부가 되었다. 이는 왕의 모후이자 막강한 권력자였던 사부아의 루이즈라는 강력한 적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속은 남편의 질투를 달래기 위해 프랑수아는 장에게 시종대장 직을 내리고, 프랑수아즈의 오빠를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했다.

총애를 받는 정부, 프랑수아즈 드 샤토브리앙

1520년, 막강한 카를 5세와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프랑수아 1세는 영국의 헨리 8세와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를 위해 양국이 협상할 중립 장소를 마련했는데, 프랑수아즈의 영향으로 왕은 태피스트리와 귀중한 가구로 장식된 호화로운 천막을 세우고 화려한 연회를 열어 헨리 8세를 현혹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금란전(Field of the Cloth of Gold)'이다. 국고를 텅 비울 만큼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헨리 8세는 굴욕감과 분노를 안고 영국으로 돌아가 카를 5세와 손을 잡았다.

프랑수아 1세를 둘러싼 여인들: 사랑과 권력의 드라마
정부의 실정을 질책한 사부아의 루이즈

격노한 루이즈는 이 실패의 책임을 왕의 정부에게 돌리며 무자비한 공세를 폈다. 그녀가 왕의 제독 보니베(Bonnivet)와 통정했다는 혐의(사실이었다)까지 제기했지만, 사랑에 눈먼 왕은 듣지 않았다. 어느 주연(酒宴)에서 한 손님이 타다 남은 장작을 왕의 머리에 던져 왕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왕은 회복했으나, 화상으로 인한 흉터를 감추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었고, 이는 16세기 유럽 남성들의 유행이 되었다.

1525년(역주: 원문 1526년이나 역사적 사실은 1525년)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원정 중 파비아 전투(Bataille de Pavia)에서 대패해 카를 5세에게 포로로 잡혔다. 프랑수아즈는 큰 절망에 빠졌다. 숙적인 루이즈가 섭정으로 임명되면서 그녀는 궁정을 떠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야 했고, 남편의 냉대를 받아야 했다. 두 연인 사이에는 애절하고 시적인 서신 왕래가 오갔고, 이는 스페인에서의 긴 포로 생활을 견디게 해주었다. 1524년 왕비 클로드가 조용히 세상을 떠나자, 프랑수아 1세는 정략적으로 카를 5세의 누이 엘레오노르와 재혼했고, 그녀 역시 이 매혹적인 왕에게 빠지고 말았다.

라이벌의 시대

거액의 몸값을 치르고 1526년 석방된 왕은 국민의 환호 속에 귀환했다. 브르타뉴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프랑수아즈는 연인의 소식을 고대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궁정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18세의 금발 미녀 안 드 피슬뢰(Anne de Pisseleu), 훗날 에탕프 공작부인이 될 치명적인 라이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여인 사이에는 격렬한 증오가 불타올랐고, 신하들은 이 경쟁을 구경거리로 삼았다. 새 정부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프랑수아즈를 여전히 사랑하는 왕은 외교적 수완으로 두 여인을 달래려 했으나 허사였다.

왕의 나약함에 분노하고 자존심에 상처 입은 프랑수아즈는 궁정을 떠나 브르타뉴로 돌아갔다. 승리한 정부 안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프랑수아즈에게 하사된 보석(아름다운 표어가 새겨진)을 반환하라고 왕에게 요구했다. 라이벌의 치졸함에 맞서 몰락한 정부는 보석을 녹여 금괴로 만들어 왕에게 돌려보냈다. 왕은 이 대담한 행동에 약간의 노여움과 동시에 웃음을 느꼈고, 금괴를 다시 돌려보내며 상황은 질투 많은 정부의 패배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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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가 머물렀던 샤토브리앙 성

1532년 브르타뉴에서 처리할 중요한 국정이 생기자 왕은 샤토브리앙에 6주간 머무르며 프랑수아즈와 재회했다. 그녀를 위해 연회, 마상 경기, 사냥, 만찬이 베풀어졌다. 하지만 볼일을 마친 왕은 안 드 피슬뢰가 기다리는 궁정으로 돌아갔고, 프랑수아즈는 다시는 프랑수아 1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진심으로 아꼈던 만큼, 몇 년간 서신 교환은 계속되었다.

왕으로부터 온갖 영예를 받은 장 드 라발은 정치적으로는 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속인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겠는가? 복수심에 불탄 그가 아내를 학대했다는 소문도 있다. 1537년 프랑수아즈의 '비참한 최후'를 둘러싸고 미스터리는 깊어진다. 질투에 미친 남편이 그녀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비극적인 이야기를 갈망하는 여론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참고 문헌

  • 크리스티안 질, 『프랑수아 1세의 여인들』, 피그말리옹, 2005.
  • 조르주 보르도노브, 『프랑수아 1세: 기사 왕』, 피그말리옹, 2006.
  • 루이즈 드 사부아, 『프랑수아 1세 모후의 일기: 1459-1522』, 팔레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