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낭트 칙령(1598): 종교적 관용의 탄생과 폐지

낭트 칙령(1598): 종교적 관용의 탄생과 폐지1598년 4월 13일,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종교전쟁의 종결을 선언하며 낭트 칙령(Édit de Nantes)에 서명했습니다. 이 칙령은 프랑스 왕국 내 개신교도(위그노)의 지위를 규정한 문서로, 신앙의 자유와 시민적 평등, 그리고 요새 도시 보유권 등 당시 유럽에서 가장 관용적인 조건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685년 루이 14세가 이를 폐지하면서 위그노 박해의 시대가 다시 열리고 말았습니다.

낭트 칙령 덕분에 오늘날 앙리 4세는 관용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실제로 이 칙령은 유럽 전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입법이었지만, 동시에 프랑스 내 개신교의 확산을 막는 수많은 제한 조항도 함께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관용의 옹호자, 앙리 4세

프랑스는 1562년부터 종교전쟁으로 깊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이후 위그노들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앙리 3세는 학살 희생자들을 명예회복시키고 일부 도시에서 위그노들의 예배를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세력은 1576년의 볼리외 칙령이 개신교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이라 여겼고, 같은 해 왕국의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가톨릭 동맹(라 리그)을 결성했습니다.

동맹은 처음에는 앙리 3세 자신에게도 반대했고, 앙리 3세는 1577년 물러섰습니다. 1589년 8월 2일 앙리 3세가 사망하자 동맹파들은 그가 지명한 후계자 나바르의 앙리 대신 부르봉의 샤를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군사적 승리를 거듭한 나바르의 앙리가 최종적으로 승리했고, 1593년에는 정부(情婦)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권유에 따라 개신교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낭트 칙령(1598): 종교적 관용의 탄생과 폐지낭트 칙령과 함께 앙리 4세는 1598년 신앙의 자유를 공식화했습니다. 덕분에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종교 의식을 자유롭게 집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98년 당시 이런 입법을 가진 나라는 프랑스가 유일했으며, 앙리 4세는 곧 관용의 화신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결정에는 당대 군주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문주의 사조가 배경에 있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 역시 16세기 초 개신교 탄압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카를 5세는 제국 내 종교전쟁을 끝내기 위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약 체결을 허용했습니다. 다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이 보장하는 자유는 제후들에게만 해당되었고, 각 제후가 자신의 영지 안에서 신앙을 강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면 앙리 4세의 칙령은 모든 백성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확실히 차별화됩니다.

양보와 제한 사이: 낭트 칙령의 실체

1598년 당시 개신교도는 프랑스 인구의 극소수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아키텐, 랑그독, 노르망디, 루아르 계곡 등 특정 지역의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었지만, 정치·군사적으로 상당한 압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낭트 칙령을 통해 여러 특권을 얻었지만, 소수파인 만큼 수많은 타협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40년에 걸친 항쟁 끝에 이루어진 협상은 몇 달간 계속되었고, 그 결과물인 칙령은 본문 95개 조항에 3개의 부속 문서가 붙은 방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협상가들이 무엇보다 염원한 것은 이 입법을 통한 평화였습니다.

낭트 칙령(1598): 종교적 관용의 탄생과 폐지낭트 칙령에 따라 모든 프랑스 시민은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갖게 되었고, 위그노들은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예배 장소는 특정 영지, 소유지 또는 양여지로 한정되었으며, 파리에는 예배당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대신 '안전 도시'라 불리는 32개의 요새가 위그노에게 넘겨졌는데, 특히 랑그독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평화 유지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사법 분야에서도 법원에 가톨릭 판사와 개신교 판사가 함께 배치되었습니다.

한편 칙령은 왕국 전역에서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고 성직자에게서 빼앗긴 재산을 반환할 것도 규정했습니다. 가톨릭 측은 상당한 보상을 얻었는데, 특히 가톨릭 세력이 강한 도시들에서 두드러졌습니다. 디종, 툴루즈, 보베, 샬롱 등에서는 위그노가 예배당을 지을 수 없었고, 이들 도시에서 개신교의 설교, 학교 설립, 저술 출판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반면 가톨릭은 왕국 어디에서나 이런 활동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칙령의 시행은 전적으로 왕의 의지에 좌우되었습니다. 그래서 앙리 4세 사후 개신교도들의 자유는 점차 축소되었고, 칙령 자체가 프랑스 내 새로운 종교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루이 14세에 의한 낭트 칙령 폐지

'관용 칙령'이라 불린 낭트 칙령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하는 이중 국가라는 매우 독특한 질서를 만들어냈습니다. 개신교도들은 일종의 '국가 안의 국가'를 형성했고, 이는 가톨릭 세력의 커다란 불만을 샀습니다. 칙령은 앙리 4세 치세에도 완전히 시행된 적이 없었습니다. 1629년 알레 칙령으로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칙령의 정치적 조항들을 폐기했습니다.

낭트 칙령(1598): 종교적 관용의 탄생과 폐지위그노 박해는 루이 14세 치세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서부와 남부에 많이 거주하던 개신교 신민들이 연합 공화국(네덜란드)이나 잉글랜드 같은 외세와 손잡을 것을 우려했고, 프랑스 교회의 통일을 회복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는 처음에는 설득을 통한 개종을 시도했으나, 1679년 이후 특히 1681년부터는 점점 더 폭력적인 탄압 정책, 이른바 '드래고나드(dragonnades)'로 선회했습니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이 폐지되자,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로 꼽히던 약 30만 명의 개신교도가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후 가해진 박해는 1702년 세방(Cévennes) 지방의 피비린내 나는 카미자르 반란을 촉발했습니다. 그럼에도 칼뱅주의는 '사막 교회'라 불리는 지하 신앙공동체 속에서 은밀하게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더 읽을거리

- Janine Garrisson, 『낭트 칙령과 그 폐지(L'Édit de Nantes et sa révocation)』, Points Histoire, 1987.

- Bernard Cottret, 『낭트 칙령(L'Édit de Nantes)』, Tempu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