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바비(Klaus Barbie)는 1942년 6월 프랑스에 도착한 독일 방첩부(SD) 소속 SS 장교로, 이듬해 2월 리옹 게슈타포의 수장이 됩니다. 러시아 전선에서 반란 진압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리옹의 사형집행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랑(Jean Moulin)을 비롯한 수많은 저항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살해했으며, 이쥬(Izieu) 아이들의 검거에도 책임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남미로 도피했던 그는 세르주·베아테 클라스펠트(Serge & Beate Klarsfeld) 부부에 의해 신원이 적발되어 프랑스로 송환되었고, 1987년 7월 4일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열성적인 나치 간부, 클라우스 바비
1913년 독일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태어난 클라우스 바비는 나치 정권이 길러낸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33년 히틀러 청년단에 가입했고, 1935년 SS에, 1937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에 차례로 입당합니다. 보안국(SD)에서 근무하던 그는 1940년 보안경찰 특무단(Sipo-SD) 소속으로 독일이 막 침공한 네덜란드에 파견되어, 헤이그에서 정치적 난민과 유대인 추적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42년 11월, 바비는 리옹에 배치되어 게슈타포 수장으로 임명되며 '반공산주의·반파업·반유대주의 투쟁'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그는 지역 저항 세력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특히 론알프(Rhône-Alpes) 지역의 여러 게릴라 조직 소탕을 지휘했습니다. 이 열성적인 사형집행인의 손길은 이쥬의 아이들에게도 닿았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의 명령으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 당국에 전범으로 공식 지명수배되었지만, 바비의 '경력'은 오히려 화려해졌습니다. 반게릴라 작전 경험과 공산주의 네트워크에 대한 지식 덕분에 그는 미 육군 대첩보부에 고용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의 인도 요청은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도피와 은신, 그리고 재판까지
1950년대 초 독일 경찰과 문제를 일으킨 바비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 등 남미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 정보기관을 계속 상대로 활동하는 한편, 무기 밀매에도 손을 뻗으며 현지 정권에도 협력했습니다. 볼리비아 독재 정권의 보호 아래 '클라우스 알트만(Klaus Altmann)'이라는 가명으로 정보기관 대리인까지 지냈지만, 결국 클라스펠트 부부의 추적으로 그의 죄행이 세상 앞에 폭로되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83년 마침내 프랑스로 송환됩니다.
자크 베르제스(Jacques Vergès)를 비롯한 변호인단의 화려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4년 뒤 시작된 그의 재판(녹화 후 텔레비전으로 방송)은 1943~1944년의 비극을 세상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비는 1987년 5월 11일 리옹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을 거부했지만, 수사 과정에서 세 가지 핵심 사건이 확인되었습니다. 1943년 2월 9일 프랑스 유대인 총연맹 관계자들의 체포, 1944년 4월 6일 이쥬 아이들의 검거, 그리고 도시 해방을 불과 15일 앞두고 600명을 실은 마지막 호송대를 아우슈비츠로 보낸 1944년 8월 11일의 사건이 그것입니다.
바비는 반인도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9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읽어볼 자료
- Peter Hammerschmidt, 『Klaus Barbie, 코드명 Adler』, Arenas, 2016.
- 『바비 재판: 리옹, 1987년 5월 11일~7월 4일』 DVD 6편, Arte Edition,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