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필리프 4세(미남왕): 프랑스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이끈 카페 왕조의 마지막 위대한 왕

필리프 4세(미남왕): 프랑스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이끈 카페 왕조의 마지막 위대한 왕'미남왕(le Bel)'이라 불린 필리프 4세는 1285년부터 1314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국왕으로, 웅장한 체격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름다운 용모 덕분에 그런 별명을 얻었습니다.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였던 베르나르 사이세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도 짐승도 아니요, 하나의 조각상이다."


역사학자들은 그의 통치를 프랑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대 중 하나로 꼽는 동시에, 가장 난해하고 미스터리한 시대로도 평가합니다. 필리프 2세(필리프 오귀스트)와 루이 11세와 더불어 프랑스의 통일을 이룬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인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자신은 단지 유능한 법률 고문들, 즉 레지스트(왕실 법무관)들의 손안에서 움직인 도구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필리프 4세가 강력하고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군주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재물을 탐낸 성전기사단에게 타협하지 않았고, 끝내 기사단의 유죄 판결과 기사단 해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유망하게 시작된 미남왕의 통치

필리프 3세(대담왕)와 아라곤의 이사벨라의 아들인 필리프 4세는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바르의 잔과의 결혼(1284년)을 통해 샹파뉴 백작령과 나바르 왕국을 손에 넣은 그는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나바르 지배는 일시적이었지만, 샹파뉴 병합은 영구적인 것이었습니다.


즉위하자마자 젊은 왕은 아라곤과의 소모적인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타라스콘 및 아냐니 조약, 1291년과 1295년). 영국과의 관계에서는 훗날 백년전쟁을 예고하는 양상으로 기옌 침공(1294~1299년)을 감행했다가, 몽트뢰유 화약(1299년)으로 에드워드 1세에게 이 지역을 돌려주었으며, 두 건의 혼인으로 이 화해를 공고히 했습니다. 바로 누이 마르그리트를 에드워드 1세에게 시집보내고, 자신의 딸 이사벨라를 에드워드의 아들에게 시집보낸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세 아들을 둔 필리프 4세의 이중 혼인 동맹이 훗날 영국 왕들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빌미가 되어, 백 년에 걸친 전쟁을 촉발할 것이라는 사실을요. 양국 간 평화는 1303년 파리 조약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플란데런 백작 기 드 당피에르를 감금하고(1295년) 그의 영지를 몰수한 뒤 프랑스 총독을 앉혀, 플란데런 병합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총독의 폭정은 브루스에서 플랑드르 시민들의 격렬한 봉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른바 '브루스의 아침 기도'(1302년 5월 17~18일)입니다. 이어진 코르트레이크 전투('황금 박차' 전투, 1302년 7월 11일)에서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도시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했습니다. 왕은 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덕분에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그는 몽상페벨 전투(1304년 8월 18일)에는 직접 참전해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발판 삼아 아티몽 화약(1305년 6월)을 통해 릴, 두아, 베튀느를 확보했습니다. 제국 방면에서는 오토 드 부르고뉴로부터 부르고뉴 백작령, 즉 오늘날의 프랑슈콩테를 받았습니다(1295년 3월). 이에 콩테 지방의 귀족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미남왕의 통치 기간 가장 중요한 영토 확장은 1312년 리옹의 프랑스 귀속입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이후에는 교황령에 속해 있던 리옹의 합병은 왕국 영토가 동쪽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교황과의 충돌, 그리고 아냐니의 굴욕

경건하지만 반성직주의적이었던 미남왕은 프랑스 내정에 대한 교황의 간섭에 맞섰습니다. 그는 보니파시오 8세와 정면충돌하게 되는데, 교황은 왕이 자신의 동의 없이 성직자에게 십일조를 징수하는 것과, 파미에 주교 베르나르 사이세의 체포 및 유죄 판결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교황이 보낸 교서들은 중세의 핵심 개념인 교황 중심의 신정 정치를 재확인하는 내용이었고,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최초의 삼부회(1302~1303년)를 소집했고, 삼부회는 왕의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습니다.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왕은 교황 선거 자체의 무효를 주장하며 폐위를 요구했습니다.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왕국 전체에 금지령을 선포하고, 프랑스 백성을 군주에 대한 충성 서약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갈등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치달았습니다. 미남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법률 고문 기욤 드 노가레의 진언에 따라, 교황을 이탈리아에서 직접 체포하기로 한 것입니다. 작전의 지휘는 노가레가 맡았습니다.


필리프 4세(미남왕): 프랑스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이끈 카페 왕조의 마지막 위대한 왕노가레는 비밀리에 프랑스를 떠나 토스카나에서 보니파시오의 이탈리아 적들, 특히 강대한 콜론나 가문의 수장 시아라 콜론나와 회합했습니다. 무장 집단을 이끌고 그는 교황이 여름을 보내던 작은 도시 아냐니로 향했습니다. 9월 7일, 그의 일당은 "교황에게 죽음을, 프랑스 왕 만세!"를 외치며 도시에 들어섰습니다. 모두에게 버려진 교황은 교황 의례복을 입고 십자가를 손에 든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곧 노가레에게 붙잡혔습니다.


후대의 전설과 달리 그는 구타당하지는 않았지만, 위협받고 모욕을 당했습니다. 노가레는 교황에게 죄목을 일일이 상기시키며 포로로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항의의 목소리가 일었습니다. 늙은 교황에게 쏟아진 모욕과 그가 보여준 용기는 아냐니 시민들의 마음을 교황 편으로 돌렸고, 결국 9월 9일 노가레 일당은 도시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로마로 호송되었지만, 이 굴욕에 깊이 상처받아 지쳐 있었고 부분적으로 정신마저 착란한 상태에서 같은 해 10월 1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왕은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선출했고, 새 교황은 1309년 아비뇽에 정착했습니다. 이 해법은 갈등을 종식시키는 임시 방편이 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3/4세기 동안 지속되는 '아비뇽 유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의 행정·재정 개혁

피에르 플로트, 기욤 드 노가레, 앙게랑 드 마리니 같은 법률가들의 영향 아래, 왕정의 중앙집권화는 왕립 법원의 전문화를 통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사법 부문(심사원과 청원원)과 재정 부문(화폐원, 그리고 그가 사망한 후인 1320년에 실질적으로 설립된 회계원)으로 기구가 분화된 것입니다. 그는 파리에 고등법원(parlement)을 정착시키고, 정치적 결정을 보좌하는 대평의회(Grand Conseil)를 설치했습니다.


특별한 혁신은 민간 여론을 참고하는 관행이었습니다. 남작, 고위 성직자, 집정관, 시참사, 공동체 시장들의 집회를 통해 여론을 묻는 이 방식은 훗날 삼부회의 전조가 되었으며, 왕은 자신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런 집회를 여러 차례 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는 재정이었습니다. 왕령지 수입만으로는 더 이상 국정 운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미남왕은 정기 과세를 도입하려 애쓰는 한편, 유대인(1306년 추방)과 롬바르디아 은행가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화폐 개혁을 거듭 단행하여 '위조범'이라는 오명까지 얻었습니다. 또한 물품에 부과하는 '말토트(maltôte, 악세)'라는 세금과, 특히 소금을 포함한 식품 판매에 부과하는 '가벨(gabelle)'을 제도화했습니다.

성전기사단 사건

가장 극적이었던, 비록 가장 성공적이진 못했더라도, 재정 작전의 표적은 성전기사단이었습니다. 한 세기 넘게 파리의 성전기사단 금고는 왕정의 실질적 금융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국고가 항상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 기사단의 부는 왕과 그 측근의 탐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성전기사단은 이미 인기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맡은 사명인 성지 방위에는 실패하면서도 서구에서는 세속적·재정적 권력을 계속 쥐고 있었다는 비난이 따랐습니다. 여기에 기사단의 지나치게 은밀한 운영 방식은 험담과 대중의 보복심이 부추기는 갖가지 전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미남왕): 프랑스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이끈 카페 왕조의 마지막 위대한 왕기욤 드 노가레의 조언, 혹은 조종에 따라 움직인 미남왕은 이러한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알았습니다. 성전기사단 재판과 기사단 재산 몰수는 왕의 평의회에서 철저히 비밀리에 결정되고 준비되었습니다. 1307년 10월 13일, 총장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해 왕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성전기사단 기사들이 체포되고 고발당했습니다. 그 후 5년에 걸친 긴 재판이 이어졌고, 1311년 비엔 공의회로 이어져 마침내 1312년 4월 3일 교황 교서에 의해 기사단은 해체되었습니다.


이 5년 동안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망설임과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성전기사단의 유죄를 전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굴의 의지로 밀어붙이고 심지어 위협조차 서슴지 않은 프랑스 왕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교황은 항복하고 기사단을 불길한 운명에 내맡겼습니다.


성전기사단 기사들의 방어는 매우 미숙했습니다. 영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스페인에서도 조사는 그들에 대한 어떤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종교재판소의 가혹한 고문에 시달린 기사들이 스스로의 방어를 포기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자백하고 말았습니다. 주요 고위 인사들 역시 매우 무능했고, 그들의 비타협적 태도는 수많은 형제들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총장 자크 드 몰레와 노르망디 관구장 제프루아 드 샤르네는 처음에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으로 강요당한 자백을 번복했습니다. 이 번복 때문에 그들은 사형수로 넘겨져 1314년 3월 18일, 시테 섬에 세워진 교수대에서 산 채로 화형당했습니다.


필리프 4세(미남왕): 프랑스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이끈 카페 왕조의 마지막 위대한 왕공의회의 판결에 따라 성전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은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구호기사단)의 보관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몫을 챙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왕실 금고가 성전기사단에 진 빚,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채무는 전부 소각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왕의 감독관들은 프랑스 내 각 성전기사단 거점에 쌓아둔 현금을 모두 압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무 증거도 없이 그리고 사실관계에 전혀 맞지 않게도, 성전기사단이 여전히 자신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 미남왕은 구호기사단에게 20만 리브르를 지불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작전은 왕과 왕정에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습니다. 다만 필리프 본인은 그 혜택을 오래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냥 사고로 인해 그는 불과 몇 달 뒤인 1314년 11월 29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남왕이 남긴 유산

필리프 4세는 자신의 정책으로 프랑스에 유럽 제1의 국가로서의 위신과 권력을 안겨준, 카페 왕조의 마지막 위대한 국왕이었습니다. 1328년 발루아 왕조가 등장하기까지 왕좌를 짧게 차례로 이은 세 아들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은 그의 발자취를 따르며 이 거대한 업적의 결실을 누리려 했습니다. 점차 복종하게 된 봉건 제후들, 군주정에 순응하게 된 교회, 그리고 근대 국가의 모습을 이미 예고하는 행정 구조를 갖추며 조직되고 확장되는 왕국, 이것이 미남왕이 물려준 유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럽 전반을 덮친 경제 위기와 샹파뉴 장터의 쇠퇴는 왕의 죽음과 함께 불만에 가득 찬 나라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미남왕의 마지막 아들이 직계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 사상 유례없는 왕위 계승 위기가 촉발되었고, 이것이 백년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참고 문헌

- Jean Favier, 『필리프 르 벨(Philippe le Bel)』, Fayard, 2013.

- Georges Minois, 『필리프 르 벨(Philippe le Bel)』, Perrin, 2014.

- Edgard Boutaric, 『필리프 르 벨 시대의 프랑스(France under Philippe Le Bel)』, Nabu Pres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