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3세(Henry III, 1551~1589)는 1574년부터 1589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발루아 왕조의 최후의 군주다.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애초에 왕위를 이을 운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재능 있는 입법가로서 종교전쟁으로 찢긴 프랑스의 국론 통합에 강한 의지를 보였고, 총명하고 교양 있는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미지는 동성애 혐오, 변덕, 폭군설 등이 뒤섞인 '흑색전설'에 가려져 있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는 후계자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가 내전을 종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1589년 8월 1일, 광신적인 도미니크회 수도사 자크 클레망의 칼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앙주 공작, 훗날의 앙리 3세
앙리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넷째 아들로, 처음엔 알렉상드르-에두아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에두아르'라는 이름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칼뱅주의 개혁에 기울어진 잉글랜드의 소년 왕 에두아르 6세가 대부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탄압에 앞장섰던 앙리 2세였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잉글랜드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세력이 커가던 위그노 귀족을 달래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발루아 가문에서 드문 이름인 에두아르는 1565년 앙리(Henri)로 개명한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블루아에서 부모와 떨어져 자랐지만, 피렌체 출신 어머니 카트린은 르네상스적 교양 교육을 아끼지 않았다. 스승 자크 에모(Plutarch 전문가)는 젊은 발루아 왕자에게서 "당대 최고의 웅변가"가 될 자질을 발견했다.
어린 나이에 왕권 행사와 연을 맺은 그는 7세 때인 1560년 첫 삼부회(에타 제네랄)에 참석했다. 어머니의 총애를 받으며 검술에 뛰어나고 준수한 외모를 지닌 그는 16세에 왕국의 부장관(lieutenant général)에 임명되며 본격적인 정치 무대에 데뷔한다.
종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 샤를 9세 다음가는 프랑스의 제2 군사령관이 된 앙리는 개신교 진영의 지도자 콩데 공작과 라이벌이 되었고, 그 갈등이 제2차 종교전쟁(1567)의 도화선이 된다.
앙리는 왕권 수호를 내세워 유능한 장군임을 입증했고, 자르낙 전투에서 콩데 공작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동생의 명성이 형 샤를 9세를 압도하자 형제 간 불화가 생겼고, 앙리는 초가톨릭파의 수장 기즈 공작(로렌 가문)과 가까워진다. 샤를 9세가 개신교도인 콜리니 제독의 영향으로 화해를 모색한 반면, 앙리는 종교적 이견이든 아니든 왕권에 대한 도전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론자였다.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1572년 8월 말)에 그가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가톨릭 동맹과 기즈 가문의 극단주의, 광신에 휩싸인 파리의 치안 유지 의무 사이에서 그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였다.
1572년 7월 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사망했다. 귀족 공화국이자 다민족·다종교 국가인 폴란드는 국왕을 선거로 뽑았는데, 귀족 상당수가 개신교도였다. 앙리는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애썼다. 그런 그가 8월 24일 개신교도 학살을 부추겼으리라 보긴 어렵다. 라로셸 공방전 실패 후, 마리 드 클레브와의 연애 속에 폴란드 국왕에 선출된다. 1573년 8월 19일 폴란드 사절단이 헨리크 발레지(Henryk Walezy)에게 왕국의 법전을 전달했다.
강력한 왕권을 선호하던 발루아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는 폴란드의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 '앙리 왕의 조항(Les Articles du Roi Henri)'에 서명해 프랑스 내 개신교 탄압 중단과 종교 관용을 약속해야 했고, 왕권이 크게 제약됨을 깨닫고 1574년 2월이 되어서야 크라쿠프로 향했다.
폴란드 왕에서 프랑스 왕으로
젊은 국왕은 신생 국가에서 종교 관용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귀족 의회(세임)와 귀족의 독립성을 용인할 수 없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분투했으나 "통치는 하나 다스리지는 못한다"는 한계만 확인했다.
1574년 6월 14일, 형 샤를 9세의 사망 소식을 접한 그는 18일 비밀리에 폴란드를 탈출한다(폴란드에서 '도주자'라는 오명을 남겼다). 9월 프랑스에 도착해 1575년 2월 13일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이틀 뒤 기즈 파와 가까운 로렌 공녀 루이즈 드 보데몽과 결혼한다. 앙리 3세는 자신의 과업이 막중함을 알았다. 평화 회복과 왕권 공고화를 위해 초가톨릭파와 위그노 양측의 환심을 사야 했다.
하지만 동생 알랑송 공작이 나바르의 앙리(훗날 앙리 4세)와 손잡고 무장 반란을 일으키며 판세가 뒤집혔다. 전쟁은 왕의 참패로 끝났고, 보에유 칙령(1576년 5월)으로 개신교에 대대적 양보를 강요당한다. 이에 반발해 가톨릭 동맹(라 리그)이 결성된다.
보에유 평화로 왕은 즉위 초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알랑송 공작이 중도파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대를 주도하며 실세로 떠올랐고, 국고는 바닥났다. 그러나 앙리 3세는 가톨릭의 굴욕을 이용해 스스로 그들의 수호자로 나서며 다시 기즈 가문과 손을 잡는다.
전비 마련을 위해 1577년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소집한 그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보인다. "삼부회가 기록할 때, 그것은 프랑스 자체가 기록하는 것이다"라며 의원들의 헌법적 개혁 시도를 분열시키고 자신이 가톨릭의 확실한 수장임을 각인시켰다. 다만 재정 지원을 얻어내진 못했고, 후대 군주들은 삼부회를 불신하게 된다.
곧 제6차 종교전쟁(1577)이 발발해 왕당파가 소기의 승리를 거두고, 푸아티에 칙령(1577)으로 개신교 측이 양보한다. 앙리는 외교로 입지를 다진다. 어머니 카트린을 매개로 나바르의 앙리와 화해하고, 동생의 네덜란드 원정을 지원해 가톨릭과 개신교가 합스부르크라는 공통의 적과 싸우게 만들었다. 훗날 앙리 4세가 계승할 구상이었다.
삼앙리 전쟁
1584년, 7년간의 상대적 평화와 입법 성과에도 불구하고 앙리 3세의 왕위는 위태로웠다. 루이즈 드 로렌과의 사이에 후사가 없던 차에, 후계자였던 알랑송 공작이 결핵으로 사망한다. 발루아 왕조의 단절이 눈앞에 왔다. 살리카 법에 따라 차기 왕은 개신교 지도자 나바르의 앙리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가톨릭 여론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파리는 동맹파 수중에 들어가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기즈 공작 앙리의 전성기였다. 초가톨릭 열기에 밀려 앙리 3세는 뇌무르 조약(1585년 7월)을 맺고 "이단자들을 왕국에서 몰아내겠다"고 약속한다. 이로써 삼앙리 전쟁(발루아의 앙리 3세, 기즈의 앙리, 나바르의 앙리)이 발발한다. 세력이 셋으로 갈린 복잡한 구도였다. 겉보기엔 초가톨릭파에 합류한 듯했으나, 앙리 3세는 개신교와도 완전히 연을 끊지 않았다. 왕국의 독립성을 지키려면 합스부르크의 지원을 받는 기즈 공작이 너무 강해지는 것도, 나바르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경멸하는 동맹파와 손잡고 존경하는 적 나바르와 싸우는 기묘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1588년 5월, 기즈 공작이 파리에 입성해 환호받으며 왕권에 도전하자, 앙리 3세는 군대를 파리에 파견했다가 바리케이드의 날(5월 13일) 봉기에 직면한다. 동맹파와 협상하며 시간을 번 그는 결단을 내린다. 파리 동맹파의 행태가 2세기 전 에티엔 마르셀의 난을 연상시키며 왕권 중앙화의 업적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판단한 것이다.
1588년 내내 기즈 공작의 입지는 좁아졌다. 무적함대 격파로 스페인 보조금이 줄어들자 광채가 바랬고, 왕이 나바르와 화친할까 봐 두려워 블루아 삼부회에서 앙리 3세와 담판을 시도한다. 1588년 12월 23일, 어전 회의에서 앙리 3세는 친위대 '사십오인(Les Quarante-cinq)'을 시켜 기즈 공작을 암살한다. 이 암살로 왕의 애매한 태도는 끝났지만, 초가톨릭파의 봉기를 불렀다. 그들은 왕을 '폭군'이라 부르며 시해를 선동했다.
앙리 3세에게 남은 길은 나바르의 앙리와 전면 화해하는 것뿐이었다. 나바르는 개신교 신앙 포기(나중엔 번복)를 조건으로 후계자가 되었고, 두 앙리는 동맹파가 장악한 파리를 합동 포위한다. 생클루에 머무르던 왕은 동맹의 와해를 보지 못한 채, 1589년 8월 1일 동맹파의 사주를 받은 광신도 자크 클레망의 단검에 쓰러진다. 이로써 발루아 왕조는 막을 내렸다.
앙리 3세, 최후의 발루아
그의 행적은 시종일관 왕권 수호와 강화로 일관되었으며, 그 환경은 극히 불리했다. 복잡한 성격과 상황 탓한 번복들은 악평을 불렀지만, 그 대부분은 당대 적들이 퍼뜨린 증오 선전의 산물이다.
나약하다고들 했다. 유력자들 압력에 굴복한 적도 많지만, 그는 매번 주도권을 되찾았다. 비겁하고 여성적이라는 비난도 따랐다. 미모의 청년들(무니옹)에 둘러싸여 사치를 즐긴 건 사실이나, 거친 중세 기사형 군주와는 달랐다. 하지만 자르낙과 몽쿠투르에서 입증된 젊은 날의 무용과 개인적 용기를 간과해선 안 된다. 동성애 소문(소위 '분홍 전설') 역시 그의 수많은 여성 편력을 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경박하고 부도덕하다는 평가도 있다. 연회와 예술을 사랑한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구원을 갈구하는 독실한 신앙인이기도 했다.
앙리 3세는 직면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국정을 운영했고, '앙리 3세 법전(Code Henri III)'이라는 방대한 입법 유산을 남겼다. 그는 왕권에 대한 높은 이상과 근대적 국가관을 지녔으며, 프랑스 왕정이 붕괴하지 않게 버텨냈다. 그 토대 위에서 후대 군주들이 다시 강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당대 지식인 아그리파 도비녜는 많은 프랑스인의 심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것이 앙리 3세의 최후다. 측근들과의 대화에 뛰어나고, 학문을 사랑하며, 어떤 왕보다 관대했고, 젊은 날엔 용맹해 모두의 선망을 샀으나, 말년에 사랑받는 이 드물었던 왕. 왕의 자질을 큰 몫 지녔고, 왕이 되기 전부터 왕이고자 했으며, 통치하지 않았다면 왕감이었다…"
참고 문헌
- - Pierre Chevallier, Henri III: Shakespearean King, Paris, Fayard, 1985.
- - Michel Pernot, Henri III, the decried king, Pocket Book, 2017.
- - Jean François Solnon, Henri III: a desire for majesty, Perrin,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