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848년 2월 혁명 — 제2공화국의 탄생과 7월 왕정의 붕괴

1848년 2월 혁명 — 제2공화국의 탄생과 7월 왕정의 붕괴기조(Guizot) 총리가 공화파 만찬 운동을 금지하면서 1848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혁명이 발발했고, 그 결과 루이 필리프 국왕이 퇴위하며 7월 왕정은 무너졌다. 이후 공화주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바로 제2공화국의 탄생이었다. 이 단기간에 일어난 혁명은 정치권 상당수를 기습적으로 덮쳤으며, 신념에 따른 공화파들과 때로는 정통왕정파(레지티미스트) 진영에서 합류한 세력들이 오를레앙 왕가에 반대하는 연합 전선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프랑스 공화파 진영의 상징적 기준점이 되었으며, 공화제 확립의 역사와 프랑스 좌파의 역사 속에서 간헐적으로 되살아나는 살아있는 기억으로 남았다.

1848년 혁명의 원인

2월 혁명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삼일 혁명(Trois Glorieuses)으로 탄생한 7월 왕정은 서서히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기조나 티에르가 상징하는 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질서에 대한 열망과, 1830년 혁명가들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외쳤던 보통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사이의 모순을 왕정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화제 찬성, 보통선거권, 선거 개혁을 구호로 내걸던 공화파 만찬의 금지 조치는 불씨에 불을 지핀 격이 되었고,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중 시위가 촉발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배경은 정치만이 아니었다. 이미 1846년부터 흉작으로 인한 농업 위기가 산업 및 금융 시장의 불안정과 맞물리며 단기적인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그 사회적 여파는 사회 약자층, 특히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참담했다. 물가 상승(특히 빵값), 감자 역병, 전통 수공예산의 원자재 비용 급등, 질병과 실업이 겹치면서 사회적 불만이 누적되어 갔다.

1848년 2월 혁명 — 제2공화국의 탄생과 7월 왕정의 붕괴위기는 동시에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고용 불안 속에 살며 작업의 기계화를 겪으며 등장한 노동자 계급은 사회의 중요한 변화였다. 착취와 빈곤화의 피해자였던 이 집단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상에 점점 더 경도되어 갔다. 동시에 소·중부르주아지는 대기업 부르주아지만 이익을 보는 정치 체제에 좌절감을 느꼈다. 이들은 진정한 평등주의, 즉 보통선거권을 갈구했다. 당시 유권자 자격 요건(납세 200프랑)과 피선거권 요건(500프랑)은 여전히 너무 엄격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학 청년층과 공화주의 지식인 엘리트들은 명망가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공식 자유주의에서 등을 돌렸다. 이들에게 '자유'와 '평등'은 혁명정신으로 물든 표어였다.

사회 구조의 마모에서 군주제가 확립한 특권 질서에 대한 거부에 이르기까지, 이 위기는 깊이 정치적이었으면서 동시에 도덕적이기도 했다. 루이 필리프의 각료들(기조가 이끄는)이 보인 억압적이고 초보수적인 권위주의, 그리고 출판과 결집의 자유 제한이라는 정치적 자유의 결핍은 군주정에 대한 감정의 뚜렷한 쇠퇴를 낳으며 체제 불안정을 완성시켰다. 국민의 상당 부분은 왕정의 정통성을 점점 더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루이 필리프는 나라를 가르는 균열의 깊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내각이 불만 세력을 달랠 수 있는 어떠한 선거 개혁도 저지하도록 방치했다.

만찬 운동(캠페인)

국민과 국가 사이의 균열은 이른바 '만찬 운동'으로 잘 드러났다. 1847년 7월 9일에 시작된 이 운동은 선거 개혁이라는 단 하나의 요구를 중심으로 공화파 야권 전체를 하나로 규합했다. 수천 명의 하객이 모이기도 했던 이 항의 만찬들에서는 개혁을 위한 건배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건배사는 길어질수록 연설로 변모했다. 이런 우회적 방식 덕분에 운동은 기조 내각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범위와 성공을 넓혀 갔다.

1848년 2월 혁명 — 제2공화국의 탄생과 7월 왕정의 붕괴1848년 2월 12일, 기조와 의회 다수파는 정부가 "현명하고 온건하며 의회적인" 개혁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던 살랑드루즈(Sallandrouze)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이에 맞서 야권은 같은 달 22일 파리에서 거대한 규모의 마지막 만찬을 열어 항의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2월 14일, 기조는 강경하게 태도를 유지하며 조직위원회에 만찬 개최 금지를 통보했다. 조직위는 그럼에도 시위 행사를 강행하겠다고 버텼으나, 21일 기조가 다시 거부권을 행사하고 군대를 동원하자 일부 조직자들은 사태 확대를 막기 위해 만찬을 취소했다.

왕조파 좌익의 영수이자 만찬 운동의 주요 추진자였던 오딜롱 바로(Odilon Barrot)는 "수레는 이미 굴러갔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내일 민중은 거리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라틴 쿼터의 학생들과 교외의 노동자들은 이미 비밀결사의 호소에 응해 거리로 나와 콩코르드 광장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곧 군대와의 첫 충돌이 벌어졌다.

1848년 2월 혁명의 전개

1848년 2월 22일, 기조는 파리 국민위병에게 소요자 진압을 요구했다. 그러나 1830년 이래 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왔던 국민위병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위대는 술트-기조 내각의 사임과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2월 23일 저녁, 혁명의 열기가 군대 일부 부대로 번지고 국민위병마저 '개혁 만세(Vive la Réforme)'를 외치며 반군 진영에 합류하는 가운데, 약 50명의 시위대가 외무성 창문 아래에서 기조를 야유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군대가 발포했고, 카퓌신 대로(Boulevard des Capucines)에 여러 명의 사망자가 남았다. 수레에 실린 시신들은 수도 곳곳에서 전시되었다. 이른바 '시신 행렬'이야말로 본격적인 봉기를 촉발한 계기였으며, 경찰은 더 이상 감히 개입하지 못했다.

1848년 2월 혁명 — 제2공화국의 탄생과 7월 왕정의 붕괴밤이 되자 정부가 마주한 것은 더 이상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바리케이드와 시가전, 총격전이 벌어지는 혁명이었다. 티에르를 대신할 것을 요구받았던 오딜롱 바로는 또다시 자리를 피했다. 한편 봉기군은 시청(Hôtel de Ville)과 튈르리 궁전을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16명의 봉기군이 군대의 총탄에 쓰러졌다.

제2공화국의 성립

국민위병이 시위대와 화해하면서 기조는 폭발적인 환호 속에 사임했다. 루이 필리프는 아홉 살배기 손자인 파리 백작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그러나 봉기군은 이미 의회가 있던 부르봉 궁전을 장악한 상태였고, 제2공화국 선포를 재촉하고 있었다. 공화국 선포는 임시 정부를 구성할 인명 명단 작성과 함께 이루어졌다. 같은 시각 봉기군은 시청도 점거했고, 그곳에서도 잠정적 통치자 후보 명단이 준비되었다. 최종적으로 임시 정부는 11개의 이름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라마르틴(Lamartine)이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로써 짧은 '낭만주의' 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제2공화국은 처음부터 현대적이고 야심찬 체제로 기획되었으며, 당시 유럽을 뒤흔든 혁명적 열기의 전형이었다. 노예제 폐지, 출판과 결집의 자유 선포, 남성 보통선거권 선포, 국립 공공사업장(국민공장) 설치 등 상징성 큰 조치들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유망한 체제는 불과 2년 만에 붕괴했다.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인물, 즉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손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참고 문헌

- 미셸 리오-사르세, 마우리치오 그리바우디, 『1848, 잊혀진 혁명(1848, la révolution oubliée)』, 디스커버리(Discovery), 2009.

- 알퐁스 드 라마르틴, 『1848년 혁명사(Histoire de la Révolution de 1848)』, 웬워스 프레스(Wentworth Pres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