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선전가에서 장례송가로: 동독 청년단 FDJ의 흥망성쇠

1946년 3월 7일은 FDJ(자유독일청년단, Freie Deutsche Jugend)의 공식 창립일로 기록된다. 며칠 뒤 슈베린에서 열린 성대한 창립 행사와 함께, 이 청년 조직은 독일 청년들의 희망의 상징이 될 것으로 기대받았다. 그러나 FDJ는 오래도록 "무소속·비당파적" 조직으로 남지 못했다.

글: 시프 슈티페콜(Siv Stippekohl)

"무소속, 통일, 민주"를 내걸며

메클렌부르크에서의 FDJ 역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함께 시작되었다. 1946년 3월 10일 일요일, 슈베린 주립극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당시 에리히 호네커의 부관이자 훗날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에디트 바우만(Edith Baumann)은 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슈베린의 소년소녀들이여, 이 순간의 무게를 느껴라! 슈베린은 자유독일청년단 역사의 커다란 이정표다. 히틀러 체제의 붕괴 이후 언젠가 독일 청년운동의 역사가 쓰인다면, 늘 반동적이라 평가받아온 메클렌부르크포어포머른 지역이 자기 주도에서 자유독일청년단의 첫 이정표를 세웠다고 기록될 것이다."

무소속 조직에서 SED의 "전투 예비대"로

사실 "자유독일청년단"이라는 이름의 조직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존재했다. 망명지의 독일 난민들이 세운 단체였다. 전쟁이 끝나고 몇 주 만에 소련군정은 "반파시스트 청년위원회"의 결성을 승인했지만, 동시에 그 밖의 다른 청년조직 설립은 금지했다. 1946년 3월 7일 FDJ가 정식으로 창립되었고, 에리히 호네커가 초대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새 청년운동은 "무소속, 통일,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공식 원칙이었다.

그러나 FDJ의 중립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합쳐진 SED(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창당, 그리고 몇 년 뒤 동독(DDR) 건국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미 1949년 열린 제3차 '청년우의회'에서 이 단체는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진보한 세력의 적극적 조력자"로 규정했다. 1952년에는 규약에서 SED의 지도적 역할을 공식 인정했고, 1957년에는 마침내 "노동계급의 당의 신뢰할 수 있는 조력자이자 전투 예비대"라는 역할을 명문화했다.

동독의 청년 누구도 FDJ를 피할 수 없었다

1951년 서독에서는 FDJ가 금지되었다. 반면 동독에서는 거의 모든 청년이 이 조직을 피할 수 없었다. 어린이를 위한 탈레반(피오네르) 조직부터 학교와 대학에서의 "사회적 헌신" 활동까지, FDJ는 청년 생활 전반을 관통했다. 형식상 유일하게 허용된 청년조직에의 가입은 자발적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가입을 거부하면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아비투어와 대학 진학의 길을 열어 주거나 막는 확장고등학교(EOS) 입학 문제에서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동독 말기인 1989년, 전체 청년의 88%가 FDJ 회원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다는 것이었다. 동독 중앙청년연구소의 미공개 조사는 청년들의 조직에 대한 비판이 커지는 반면, 진정한 연대감은 옅어지고 있음을 이미 확인하고 있었다.

회원 확보 경쟁, 그리고 교회 청년회와의 충돌

창립 초기 FDJ는 자발적 가입에만 의존해 회원을 모으고 대중조직으로 성장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동독 건국 이전인 1947년에는 전체 청년의 16%만이 가입해 있었다. 이후 정치적·선전적 압력이 더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전후에는 교회 청년사업이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다. 특히 동독 복음교회 안의 청년회(융게 게마인데, Junge Gemeinde)가 젊은이들을 끌어들이자, 그 즉시 탄압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 초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학생들은 박해를 받았다. 슈베린의 괴테학교를 비롯한 학교들에서는 공개 재판을 방불케 하는 학교 집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질책당하고, 만인 앞에 내몰리고, 모욕당한 끝에 퇴학당했다. 1953년 4월 1일 FDJ 기관지 《융게 벨트(Junge Welt)》는 캠페인 기사에서 이 청년회를 "미국의 지시를 받아 전쟁몰이, 파괴공작, 간첩행위를 벌이는 전위 조직"이라 규정했다. 퇴학 처분이 훗날 취소되었을 때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서방으로 떠난 뒤였다.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맹세를 담은 노래들

전쟁의 참화 직후 청년단체의 창립에는 커다란 희망도 함께 걸려 있었다. 그 희망은 노래로 표현되었고, 노래는 FDJ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이미 1946년, 청년들을 사회주의 이념에 결속시키기 위한 "청년을 위한 대중가요"를 담은 첫 노래집이 나왔다. 1948년 파울 데사우(Paul Dessau)가 작곡하고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쓴 FDJ 재건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낡은 것은 물러가고, 새 나라를 세우자! 잔해를 치우고 그 위에 새것을 세우자! 우리 스스로 손을 잡고, 감히 막서는 자들에게 맞서 나아가자!"

브레히트는 연대가(連帶歌)의 가사도 남겼다. "앞으로 나아가되, 우리의 힘이 어디 있는지 잊지 말라. 굶주림에도 밥상 앞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되 연대를 잊지 말라!"

슈베린에서 울려 퍼진 FDJ를 위한 장례송

1946년 3월 10일 슈베린의 메클렌부르크 주립극장에서 음악으로 시작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머른의 FDJ 역사는, 바로 그곳에서 역시 음악과 함께 막을 내렸다. 연출가 크리스토프 슈로트(Christoph Schroth)가 기획한 전설적인 'FDJ 노래의 밤'이 1980년대 말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50~60세의 배우들이 젊은 시절 부르던 오래된 FDJ 노래를 불렀다. 가수들은 깃발처럼 붉은 배경 앞에 섰고, 머리 위에는 그들의 젊은 날 사진이 담긴 벽이 펼쳐져 있었다. 전후의 세월, 그리고 당시 싹트던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울었고, 관객들은 객석에서 울었습니다." 고인이 된 에케하르트 한(Ekkehard Hahn)과 여배우 잉그리드 미할크(Ingrid Michalk)가 2006년 NDR 1 라디오 MV와의 인터뷰에서 회상한 대목이다. 동독의 마지막 시기, 배우들은 젊은 날의 이념과의 작별을 노래했다. 40여 년 전 같은 장소에서 선포되었던 바로 그 이념들을. 미할크는 무대 활동 외에도 1964년 셰익스피어 원작 영화 『헛스무덤(Much Ado About Nothing)』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은 라디오와 TV 출연으로 널리 얼굴을 알렸다. 두 사람 모두 이 FDJ 노래의 밤 기획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을 위해 노래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던 순간이 아주 생생합니다." 미할크가 훗날 이야기했다. "청춘의 한 조각이 되살아났어요.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또 가끔은 웃음이 터질 만큼요." 한도 당시 이렇게 덧붙였다. "노래를 연습할 때면 눈시울이 자주 뜨거워졌지요."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가사였어요"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한이 2006년 인터뷰에서 정리했듯이, "우리가 이 노래들을 그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불렀다는 점입니다. 행진곡처럼 부르지 않았어요. '덜컹, 덜컹, 새 삶이 시작되어야 해'라는 식으로, 발맞춰 걸을 수 있는 곡조가 아니었던 거죠. 우리는 그걸 바꿨습니다. 그러자 노래에는 이전에는 없던,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았던 깊이가 생겼어요. '맙소사, 우리가 불러대던 이 가사,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글이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된 가사는 스스로 힘을 발휘했다. "이 삶과는 다른 새 삶이, 이 시대와는 다른 새 시대가 와야 한다… 우리 모두 손을 잡으면, 우리 나라에도 새 삶이 온다"는 구절은 더욱 그러했다.

1989년 11월 4일, 슈로트는 FDJ 노래 회의 후속 공연으로 슈베린 무대에 독일 민요를 올렸다. 19세기의 노래 「내 크리스티안은 어디 있나, 함부르크일까 브레멘일까」가 극장에 울려 퍼졌다. 그로부터 5일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국경이 열렸다.

휘어지고 잃어버린 이념을 추모하듯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축전을 맞아 메클렌부르크 주립극장의 앙상블은 베를린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의 폭스뷔네(인민극장) 무대에 섰다. 배우들은 FDJ 노래를 불렀다. 이번엔 작별을 담아서. 2006년 인터뷰에서 미할크는 이 공연이 자신을 얼마나 젊은 날로 되돌려 보냈는지 털어놓았다.

"어떤 노래들은 열정으로 불렀어요. 우리가 세계 최고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순수한 믿음과 함께요. 늘 묻던 질문이 있었죠. '평화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모든 것에 찬성하는 것이다.' 그런 정서가 이 노래들 전부에 배어 있습니다." 그 이념들이 수십 년에 걸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해서 FDJ 노래 회는 많은 이들에게 애도의 시간이 되었다. 일종의 부메랑처럼, FDJ의 선전가(宣傳歌)들은 동독과 그 실패한 사회 실험을 추모하는 장례송가(葬禮頌歌)로 변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