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 파리의 밤을 덮친 프랑스 종교전쟁 최악의 참극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 파리의 밤을 덮친 프랑스 종교전쟁 최악의 참극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은 1572년 8월 23일 심야부터 24일 새벽에 걸쳐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가톨릭과 개신교(위그노) 사이 종교전쟁 최악의 참극입니다. 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의 결혼으로 양 진영의 화해가 기대되던 시기,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개신교 귀족들이 표적이 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콜리니 제독의 시신이 훼손된 것을 기점으로 수도의 종이 울려 퍼졌고, 파리에서만 3,000~4,000명의 개신교도가 살해되었습니다. 앙리 드 나바르와 콩데 공작은 개종을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학살은 10월까지 지방 도시로 번져 제4차 종교전쟁의 불씨가 되었으며, 정확한 집계는 어렵지만 전체 희생자는 약 13,000명으로 추산됩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의 배경

프랑수아 2세의 짧은 통치가 끝난 1560년, 동생 샤를 9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0세였고 실권은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에게 있었습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와시(Wassy) 개신교 학살, 루앙과 드뢰 전투(1562~1563)에서의 가톨릭 승리, 자르나크 전투(개신교 지도자 콩데 공작이 전사한 곳) 등 끊임없는 내란에 시달렸습니다. 섭정 카트린은 화해 정책을 추진했고, 생제르맹 강화조약(1570)을 통해 양 진영 간 평화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 파리의 밤을 덮친 프랑스 종교전쟁 최악의 참극필리프 2세의 스페인과의 전쟁 부담과 플랑드르 정복 문제는 프랑스를 내전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화해의 첫 상징은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이었으나, 전국적으로 특히 파리에서는 강경한 가톨릭 여론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스페인과의 전쟁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치지 않으면 발루아 왕조가 다수 여론의 지지를 받는 기즈(Guise) 가문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콜리니 제독 암살 미수 사건

프랑스 해군대장 가스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는 1562년 이래 개신교 무장투쟁의 핵심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숙적이었던 프랑수아 드 기즈(François de Guise)는 1563년 사망했고, 새 기즈 공작 앙리는 대립을 이어갔습니다. 1571년 파리로 거처를 옮긴 콜리니는 왕실 평의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572년 8월 18일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지만, 화려한 축하 행사는 나흘 뒤 모르베르(Maurevert)가 콜리니 제독을 저격하며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저격이 아들에 대한 콜리니의 영향력을 경계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소행이라고 보지만, 제독의 적이 많았던 만큼 다른 가설도 가능합니다. 앙리 드 기즈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주장했고, 필리프 2세와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 독립을 위해 오라녜 공 빌럼을 지원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습니다. 단순히 모르베르의 개인적 원한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음모가 실패하자, 결혼식을 위해 파리에 머무르던 위그노 귀족들은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습니다.

8월 24일의 밤, 학살의 시작

종교전쟁으로 팽팽해진 파리의 분위기는 한계에 달해 있었습니다. 설교자들은 군중을 선동했고 가톨릭 공주와 개신교도의 결혼은 비난받았습니다. 여기에 결혼식을 위해 수천 명의 위그노가 수도에 몰려든 상황에서, 저격 사건 이후 그들은 '정의'의 실현을 요구했습니다. 콜리니와 주요 개신교 지도자들에 대한 살해 결정은 8월 23일 밤 내려졌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 결정의 책임 소재를 두고 역사가들의 견해는 분분합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저격 음모에 대한 처벌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샤를 9세는 신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으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할 기회로 삼았을 수 있고, 왕실 평의회의 초강경 가톨릭파는 비타협 노선의 복귀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기즈 가문보다 먼저 개신교 진영의 지도부를 제거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 즉 대규모 가톨릭 세력이 왕권에 맞서 조직화되는 것을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 파리의 밤을 덮친 프랑스 종교전쟁 최악의 참극결국 샤를 9세는 학살을 승인했습니다. 이미 극도로 격앙되어 있던 파리 민중은 생제르맹로세루아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콜리니 제독을 포함해 3,000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루브르 궁전 안에서도 개신교도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압도적인 사태 앞에서 샤를 9세는 처남 앙리 드 나바르와 강제 개종으로 목숨을 건진 콩데 공작을 구하는 데 성공했으나, 두 사람은 1576년까지 궁정에 유폐되었습니다. 이후 왕은 '정의의 침대(lit de justice)'에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의 책임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개신교 진영은 지도부가 참수당했지만, 가장 강경한 세력은 서부·라로셸 인근·남부 지역으로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학살의 확산과 역사적 결과

폭력은 며칠 만에 여러 지방 도시(라샤리테, 모, 부르주, 오를레앙, 앙제, 리옹, 트루아, 루앙, 보르도, 툴루즈, 알비 등)로 확산되어 약 1만 명이 추가로 희생되었습니다. 많은 개신교도가 개종을 강요당해 1580년대에는 신자 수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여전히 무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폭군'으로 비난받은 샤를 9세에 대한 도전은 이론의 영역을 넘어섰습니다. 테오도르 드 베즈(Théodore de Bèze) 같은 작가들은 성 바르톨로메오 이후 왕권 자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샤를 9세는 양보를 강요당해 1573년 7월 11일 불로뉴 칙령을 통해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 참극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참고문헌

  • La Saint-Barthélemy: 국가 범죄의 미스터리(1572년 8월 24일), Arlette Jouanna 지음, Folio, 2017.
  •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 르네상스의 잃어버린 꿈, Denis Crouzet 지음, Fayard, 1994.
  • 종교전쟁의 역사와 사전, Gallimard,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