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디르크 플라스베르크(Dirk Plasberg), NDR 1 니더작센
1989년 9월 말, 수천 명의 동독 시민이 자유를 찾아 프라하 주재 독일 연방공화국 대사관으로 탈출했습니다. 이곳에서 난민들을 돌본 두 명의 서독 간호사 중 한 명인 파이네(Peine) 출신의 안네그레트 요한(Annegret John)은 당시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출발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1989년 9월 30일 오후 6시 58분, 당시 연방 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대사관 발코니에서 역사적인 한 마디를 외쳤을 때, 요한은 소름이 돋는 듯한 감격 속에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기쁨은 끝을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그녀는 회상합니다.
한스디트리히 겐셔, 동독 시민들을 구출하다
"겐셔 장관이 문을 통해 들어서자 사람들은 그를 즉시 알아보고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해결책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날 대사관 건물에는 약 5,000명의 사람들이 가득했고, 샤워실과 화장실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틀 전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2,500명의 난민이 있었고, 매시간 더 많은 사람들이 뒷담장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체코 경찰이 정문을 경비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아이들을 담장 너머로 넘겨주고 그다음에 짐을 건넸습니다." 당시 41세였던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며칠 동안 프라하 대사관에 머문 사람들
위생용품과 의약품은 매일 프라하 대사관으로 운반되어야 했습니다. 출국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3단 침대가 설치된 텐트나 직접 가져온 캠핑 텐트에서 지냈습니다. "공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대사관 건물의 넓은 계단에서 며칠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실상 그곳에서 생활한 것이나 다름없었죠. 더 이상 빈자리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날씨는 맑고 건조했습니다." 간호사는 물류 조율도 담당했습니다. "밴은 매일 아기 기저귀, 세면도구, 수건, 의약품을 실어 날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렸고, 울타리를 넘다가 찰과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대사관 건물에 펼쳐진 '질서 있는 혼란'
현장에는 임시 급식소도 마련되었습니다. 배식대에는 굴라슈와 국수가 제공되었고, 줄은 길게 늘어섰지만 모두 인내심을 유지했습니다. 안네그레트 요한은 그곳의 분위기를 '질서 정연한 혼란'이라고 표현합니다. "젊은이들도 많았고, 자녀를 둔 가족들이 대사관을 통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함께 보드게임도 하며 지냈죠. 그리고 모두가 같은 것을 바랐습니다. 행복한 결말이 올 것이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희망입니다." 겐셔 장관의 구원 선언 이후 버스가 준비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너무 두려워서 대사관을 허가 없이 나가 버스에 오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사관 직원들이 함께 탑승했습니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도 직원의 동행을 요청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병원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파이네 DRK(독일 적십자) 여성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그녀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난민들 자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누가 의학 지식이 있는지 물었고, 우리를 도운 동독 출신 의사와 간호사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연방공로십자훈장 제안을 거부한 안네그레트 요한
안네그레트 요한은 일주일 동안 대사관에서 봉사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빛납니다. 감동이 담긴 일기장과 기저귀·약품 주문 목록,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격동의 시기를 기록한 신문 스크랩까지 그녀는 당시의 흔적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프라하의 그 한 주는 평생 단 한 번뿐인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도움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었기에, 그녀는 연방공로십자훈장 서임 제안도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통일과 자유를 위한 저의 작은 기여였습니다. 지금 다시 그 상황이 온다면 똑같이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