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의 새로운 시대는 1946년 10월 13일에 시작되었습니다. 광범위하게 파괴된 도시에서 시민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함부르크 의회를 직접 뽑는 날이었죠.
작성자: Marc-Oliver Rehrmann, NDR.de
투표함으로 쓸 합판도, 투표용지에 표시할 연필도, 봉투를 봉인할 초마저 부족했습니다. 1946년 10월 13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州) 선거는 극도로 열악한 여건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선거가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자동맹 도시 함부르크에서 열린 최초의 자유선거였기 때문입니다. 함부르크 시민들은 이름에 걸맞은 자유로운 선거를 위해 1932년 4월 이후 무려 14년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나아가 이번 선거는 함부르크 역사상 최초의 자유 투표이기도 했습니다. 1937년 대(大)함부르크법으로 도시 경계가 크게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거를 통해 오랫동안 도시의 운명을 이끌어갈 시장이 탄생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시기였습니다"
1946년 가을, 한자동맹 도시 함부르크는 대도시라기보다 거대한 폐허밭처럼 보였습니다. 아파트의 60%가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였고, 90만 명의 시민이 소유물 전부를 잃었습니다. 전쟁 중 대피했던 28만 명의 시민은 아직도 도시 외곽에 머물러 있었으며, 영국군 정부는 이들의 귀환조차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니센 오두막'이라 불리는 주석 막사에서 간신히 몸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함부르크 현대사 연구센터의 크리스토프 스트루프(Christoph Strupp)는 "첫 번째 총선이 치러진 때는 극단적인 시기였다"고 말합니다. 당시 인구의 90%가 영양실조 상태였고, 건축 자재와 석탄 같은 연료는 곳곳에서 절실했습니다.
그럼에도 선거는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독창성 덕분입니다. 나무 투표함 대신 영국군이 바트제게베르크(Bad Segeberg)에서 운반한 수천 개의 개조된 탄약 상자가 투표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민당의 '보이지 않는' 최고 후보
막스 브라우어(Max Brauer)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던 인물로, 1946년 망명 생활을 끝내고 함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는 사민당(SPD)과 기민당(CDU)의 승리가 유력하게 점쳐졌습니다. 기민당의 유력 후보는 현직 시장 루돌프 페터센(Rudolf Petersen, 전(前) 함부르크 시장 카를 피터슨의 남동생)이었습니다. 해외 상인 출신인 그는 항복 직후인 1945년 5월 "무거운 마음으로" 직책을 수락했습니다. 스스로를 정치인이라 여기지 않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 결국 자리를 받아들였고, 기민당에 입당한 것도 1946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반면 사민당은 '보이지 않는' 최고 후보를 내세워 선거운동을 벌였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사민당이 승리하면 막스 브라우어가 시장직을 맡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전(前) 알토나 시장(1924~1933)인 그는 선거 포스터에는 등장하지 않았고, 선거운동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망명 기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배고픔과 어려움 속의 선거운동
역사학자 스트루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1946년 가을에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선거운동이 없었습니다." 주택난과 식량난 등 절박한 문제 앞에서 정당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권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기민당은 별도의 선거 강령 없이 활동하며, 사회주의·자유주의 세계관을 기독교-서양 전통에 대한 위협으로 프레임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반면 사민당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로 28개 조항의 행동 강령을 마련했습니다. 오직 사회주의적 함부르크만이 "건강하고 다시 번영하는 함부르크"가 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핵심 지지층은 물론 노동자였고, 1946년 8월 사민당 대규모 선거 집회에는 무려 5만 명이 플란텐 운 블로멘(Planten un Blomen) 공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구(舊) NSDAP 당원 다수도 투표에 참여
21세 이상이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장애물이 있었으니, 과거 제3제국과의 연관이 그것입니다. 14,000명이 넘는 함부르크 시민이 정치적 이유로 선거권을 박탈당했습니다. 게슈타포나 SS에 소속되었던 이들이 대표적이며, NSDAP(나치당)의 주요 간부들 역시 투표소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33년 3월 1일 이후 NSDAP에 입당한 시민들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나치 조직의 하급 직원 상당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규정이 늘 논리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치 전쟁피해자 연금 제도의 '청소부'는 투표권에서 배제된 반면, NSDAP의 '청소부'는 투표권을 가졌습니다.
'알파벳의 승리'
이 선거의 특이한 면모는 투표용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후보자들이 정당별로 배열되지 않고 엄격하게 알파벳순으로 정렬된 것입니다. 이는 영국 군정이 원한 방식이었죠. 그 결과 알파벳 순서상 앞선 후보가 투표용지에서 더 위쪽에 위치하게 되면서, 당선 확률이 높아지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1947년 여름 통계청 특별선거보고서의 저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적어도 각 정당 내에서는 알파벳 순서가 개인 선택을 압도했다고 거의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열된 후보가 일반적으로 동료 당원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1946년 선거 결과
1946년 10월 13일 주 선거에서 함부르크 시민들은 다음과 같이 표행했습니다.
SPD 43.1% – 83석
CDU 26.7% – 16석
FDP 18.2% – 7석
KPD 10.4% – 4석
기타/무소속 후보 1.6%
투표율은 79%를 기록했습니다.
"CDU에 대한 커다란 실망"
사민당의 승리로 평가되지만, 목표했던 절대 다수 의석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CDU와 FDP의 득표율을 합치면 오히려 사민당보다 높았습니다. 그러나 선거제도 덕분에 사민당은 43.1% 득표로 시의회 의석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반면 기민당에게 이 선거는 쓰라린 실망으로 끝났습니다. 페터센 시장은 1945년 이래 시민들이 자신의 헌신을 기억해주길 바랐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기민당은 고작 16석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참고로 전후 최초로 선출된 의회 110석 중 93석은 남성, 17석은 여성이었습니다.
놀랍도록 높았던 투표율
79%의 투표율은 정치적 무관심론을 일축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당대 관찰자들은 안도감 속에 이를 평가했습니다. "전쟁포로 문제, 식량과 주택에 대한 걱정, 유권자 상당수가 구(舊) NSDAP 당원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시민이 군정 아래 매우 제한된 권한만 가졌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많은 유권자가 투표소를 찾았다"고 함부르크 선거연구자는 기록했습니다.
사민당의 강자, 막스 브라우어
막스 브라우어는 오랫동안 함부르크의 운명을 결정해온 인물입니다. 1953년 4월, 그는 시청에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연방총리(왼쪽)를 영접하고 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막스 브라우어의 전후 시대는 사민당의 선거 승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선거 직후 열린 사민당 회의에서 그는 만장일치로 "비할 데 없는 박수" 속에 시장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1946년 10월 21일, 브라우어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려운 임무를 위해 모든 역량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의 핵심 과제는 도시의 기아와의 싸움, '품위 있는 독일 주택'의 건설, 그리고 항구 재건이었습니다.
다만 남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직 독일 시민만이 함부르크 시장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사민당 정치인은 10월 25일, 당시 루돌프 페터센 시장으로부터 귀화 증명서를 받아냈습니다.
CDU는 배제되다
사민당은 연정 파트너에 의존할 필요는 없었지만, 단독정부 구성은 신중히 삼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FDP 및 KPD와의 동맹이 형성됩니다. 처음에는 CDU도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사민당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협상을 중단합니다. 기민당이 경제부 장관직을 요구했기 때문인데, CDU 측은 사민당이 처음부터 진지한 연정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FDP는 3개 상원의원직을, KPD는 1개 상원의원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민당 정치인 파울라 카르핀스키(Paula Karpinski)가 청소년 상원의원으로 임명되면서, 여성 최초로 함부르크 상원의원이 배출되었습니다.
"토론클럽 그 이상"
1946년 11월 중순, 새 상원은 막스 브라우어를 제1시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역사학자 스트루프는 NDR.de에 "그는 자신의 당 내에서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권위적인 인물로 여겨졌다"며 "전직 미국 시민이었던 그는 영국군에게 자신의 견해를 특히 강력하게 피력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정부 성명에서 브라우어는 군정에 도시에 충분한 식량 공급을 보장하고, 생활 공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국가의 최소 수요가 충족되는 경우에만 석탄을 수출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비록 과도기가 한동안 이어졌지만, 스트루프는 "새로 선출된 의회는 토론클럽 그 이상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점차적으로 사법부와 경찰 등의 권한이 영국 군정에서 상원으로 이양되어 갔습니다.
3개월간의 혹한, 1946/47년 기아의 겨울
수많은 함부르크 가족에게, 특히 1946/47년의 혹독한 겨울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시장 선거에서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 몇 주 뒤 시작됩니다. 1946~47년의 겨울은 20세기 가장 추운 겨울 중 하나였습니다. 12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 땅이 완전히 얼어붙었고, 기온은 때때로 영하 25도까지 떨어졌습니다. 85명이 추위에 얼어 죽었고, 거의 500명의 시민이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석탄과 식량 공급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1946년 12월 28일, 막스 브라우어는 비상 프로그램을 발표합니다. 개별 가구에는 하루 단 2시간만 전기가 공급되었고, 영화관·극장·학교는 별도 공지가 있을 때까지 폐쇄되었습니다. 대중교통은 크게 축소되었고, 상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영업했습니다. 상황은 오랫동안 극적으로 이어졌지만, 3월의 해빙과 함께 함부르크 시민들은 희망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일상이 근본적으로 개선된 것은 1948년 여름 화폐개혁 이후였습니다. 이제 상점 진열대에는 다시 상품이 가득했고, 도시 재건에 필요한 건축 자재도 충분히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957년 선거에서 승리한 막스 브라우어는 3년 뒤 후임 폴 네버만(Paul Nevermann)에게 시장직을 물려주었습니다.
2011년 세상을 떠난 함부르크 선거연구자 발터 토르민(Walter Tormin)은 "전후 첫 의회와 첫 상원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며 "화폐개혁 이전의 고통을 최선을 다해 완화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사민당은 1949년 10월에 열린 다음 함부르크 총선에서도 승리하며 막스 브라우어의 재임을 이끌었습니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만 선거 패배로 시장직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을 뿐입니다. 마침내 1960년 12월, 73세의 나이로 그는 폴 네버만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퇴임 무렵 함부르크 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시의회는 그를 명예시민으로 임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