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전쟁 폐허에서 독일 최대 제작사로, 리얼필름에서 스튜디오 함부르크까지 70년의 여정

소품도, 스튜디오도 거의 남아있지 않던 전후 폐허 속에서 1947년 1월 10일 설립된 리얼필름(Real-Film), 즉 오늘날 스튜디오 함부르크(Studio Hamburg)의 전신은 첫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현재 이 회사는 '그로슈타트레비어(Großstadtrevier)'와 같은 인기 시리즈를 제작하며 독일 방송 산업을 이끌고 있습니다.

작성자: 카트린 베버(Katrin Weber)

옛 댄스홀의 좁은 방이 스튜디오가 되었고, 무명 배우들은 옷장에 들어섰으며, 서커스 마차가 분장실로 쓰였습니다. 할리우드의 화려함과는 대조적인 풍경입니다. 1947년 3월 1일, 함부르크에서 최초의 전후 영화 중 하나가 촬영되기 시작한 조건은 극도로 열악했습니다. 그러나 줄라 트라비치(Gyula Trebitsch)와 발터 코펠(Walter Koppel)은 낙관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해 1월 10일 리얼필름이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이제 출발점에 섰습니다. 첫 번째 작품의 이름은 '아르케 노라'였습니다.

'아르케 노라': 암시장에서 구한 소품들

즉흥적인 재능으로 역경을 헤쳐 나간 제작진. 빌레 강의 오래된 바지선은 야외 촬영 배경이 되었고, 기술 장비는 동베를린의 DEFA에서 빌려 왔으며, 필요한 소품은 암시장에서 구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할 닭마저 정원사에게 임대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코펠은 화려한 세트나 과도한 비용 없이 검소하게 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위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다. 어려움에 처한 독일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영화를 찍는 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우리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촬영 현장은 폭격당한 도시의 일상과 다를 바 없었고, 곳곳에 식량 부족이 있었지만 이는 극복 가능한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그것이 곧 영화의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아르케 노라'는 모든 것을 잃고 목숨을 끊으려는 젊은 여성과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난파선에 몸을 실어 온 두 젊은이가 이 부부를 구합니다.

희망을 건 잔해 영화

"사소함 없는 낙관주의": 전후 관객들은 영화 '아르케 노라'의 정직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영화는 관객과 비평가 모두에게 호응을 얻었습니다. 1948년 2월 6일 워털루 극장 초연 후 데어 슈피겔(Der Spiegel)은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정말 젊은 사람들이었다"고 평했습니다. 관객들 역시 이 잔해 영화(Trümmerfilm)를 사랑했습니다. 영화 역사가이자 트라비치 전기 작가인 미하엘 퇴테베르크(Michael Töteberg)는 "리얼필름은 동시에 재건 영화이기도 했다. 관객은 우울한 마음으로 극장을 떠나지 않았다"며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성공적 영화 제작의 초석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영화의 도시 함부르크를 연 최초의 불씨라는 점입니다. "'아르케 노라'는 함부르크에서의 첫걸음이 되어, 이 도시에서 영구적인 영화 제작의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제적인 의미도 갖게 될 것이다." 줄라 트라비치는 '아르케 노라' 촬영을 시작하며 이 말로 팀을 격려했고, 그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다음 영화는 1948년 가을, 톤도르프에 지은 회사 자체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고, 이후 몇 년간 스튜디오는 계속 확장되었습니다. 빌리 프리치(Willy Fritsch), O.W. 피셔(O.W. Fischer), 마리안네 호페(Marianne Hoppe), 자라 라이더(Zarah Leander) 같은 스타들을 포함해 1950년까지 12편의 영화가 추가로 제작되었습니다.

오스카 후보에 오른 '코페니크 대위'

국제적 돌파구는 1956년 '코페니크 대위(Captain von Köpenick)'와 함께 열렸습니다. 헬무트 카우트너(Helmut Käutner) 감독, 하인츠 뤼만(Heinz Rühmann) 주연의 이 드라마는 독일 극장에서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해외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으며, 독일 영화상 6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한스 알버스(Hans Albers) 주연의 '성 파울리의 심장(Das Herz von St. Pauli)', 리제로테 풀버(Liselotte Pulver) 출연의 '취리히의 약혼(Die Zürcher Verlobung)'처럼 오늘날 클래식이 된 작품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리얼필름의 파산, 그리고 TV 제작으로의 진출

1960년은 전환점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의 위상이 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줄라 트라비치가 새 매체에 희망을 걸었지만 발터 코펠은 회의적이었고, 끝내 영화만을 믿었습니다. 결국 두 창업자의 길은 갈라집니다. 리얼필름은 '리얼필름 발터 코펠 KG'로 이름을 바꾸고 장편 영화 제작을 이어갔지만 1965년 파산했습니다. 트라비치는 NDR 광고 자회사 NWF와 함께 '리얼필름 아틀리에 운영회사(Real-Film Atelierbetriebsgesellschaft mbH)'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튜디오 함부르크(Studio Hamburg)로 개명되었으며 이후 제작 활동을 이어갑니다. 주로 TV용 콘텐츠 제작과 스튜디오 임대 사업이 그 축이었습니다.

시리즈로 성공한 스튜디오 함부르크

1993년 '그로슈타트레비어' 에피소드에서 디르크 마티스 역의 얀 페더(Jan Fedder)와 엘렌 베거너 역의 마리케 카리에르(Mareike Carrière, 왼쪽).

이후 스튜디오 함부르크는 인기 배우들이 출연하는 시리즈 제작에 점점 더 집중했습니다. 이런 시리즈는 독일 저녁 전 시간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일부는 해외 수출에도 성공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귄터 피츠만(Günther Pfitzmann) 주연의 '내 이름은 콕스', 인게 마이젤(Inge Meysel)의 '게르트루트 슈타니츠키', 범죄 시리즈 '하펜폴리차이(Hafenpolizei)'와 '폴리차이펑크 루페(Polizeifunk ruft)'가 제작되었습니다. 1970년에는 첫 '타토르트(Tatort)'가 이어졌고, 이후 '세서미 스트리트', '트라움쉬프(Das Traumschiff)', '슈바르츠발트 클리닉' 등이 잇달아 탄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인기 시리즈가 스튜디오 함부르크에서 제작되고 있습니다. 시청자 사랑을 독차지하는 '로제 로젠(Rote Rosen)'과, 2019년 세상을 떠난 배우 얀 페더(Jan Fedder)가 경찰관 디르크 마티스 역으로 분했던 '그로슈타트레비어'가 대표적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다

오늘날 스튜디오 함부르크는 독일 최대의 영화·TV 제작사 중 하나이자, 한자 도시 함부르크의 중요한 고용주이자 교육 기업입니다. 약 800명의 정규직 직원과 800명이 넘는 프리랜서를 고용하고 있으며, 독일어권 영화 학교와 협력해 젊은 인재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비하고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최근 몇 년간 포트폴리오를 꾸준히 확장해 왔으며, '마르노의 죽음(Die Toten von Marnow)' 같은 이벤트 시리즈와 '보르크바르트 사건(Die Affäre Borgward)' 같은 정교한 다큐멘터리에 힘을 실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