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453년 4월 18일,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향한 오스만 제국의 첫 공격

1453년 4월 18일,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향한 오스만 제국의 첫 공격

포위망이 좁혀지다

1453년 4월 6일, 오스만 군대는 '도시들의 왕'이라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앞에 도달하여, 성벽에서 1,200미터를 넘지 않는 거리에 진영을 구축했다. 공격 개시 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친오스만파 기록가 크리토불로스 임브리오스의 전언에 따르면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에게 도시를 넘겨줄 것을 요청했으나, 첫 번째 거절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후 그는 도시에 대한 완전한 포위 명령을 내렸다.

알바니아 출신 장군 자간 파샤는 페라(갈라타) 지역 군대의 지휘를 맡았고, 보스포루스 해협 양안을 연결하는 다리까지 건설했다. 북부 전선, 즉 케라티오 해안부터 하리시 문에 이르는 구역은 카라차 파샤가 담당했다.

중앙에는 메흐메트가 정예 예니체리 15,000명과 근위대와 함께 위치했고, 우익에는 할릴 파샤가 배치되었다. 리코스 강 계곡에서 황금문에 이르는 전선은 아시아군 사령관 이삭 파샤가 유럽군 사령관 마흐무드와 함께 맡았다. 이러한 배치를 통해 오스만군은 성벽에 더욱 가까이 접근했고, 메흐메트는 해자에서 불과 350미터 떨어진 곳에 화려한 본영 텐트를 치았다.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대포의 포격

도시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세 겹의 요새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 번째 중간 성벽은 수비병들이 배치된 내곽이었으며, 육상 성벽의 총 길이는 6,808미터에 달했다.

포위를 완료한 메흐메트는 포병에게 성벽 포격을 명령했다. 12일 동안 오스만의 대포는 멈추지 않고 고대 도시의 성벽을 두드려 큰 피해를 입혔다. 한 헝가리인이 오스만군에게 필수적인 사격 기술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조언 덕분에 오스만 포수들은 탑 하나와 그 옆 성벽 일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포위된 수비군은 양모를 채운 자루를 성벽에 매달아 포탄의 충격을 줄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르반 대포'의 발사 결과는 특히 처참했다. 다행히 그 거대한 대포는 몇 발을 쏜 뒤 과도한 화약 장착으로 폭발하여 포수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수리된 후에는 하루 7발씩 발사되었다. 성벽의 피해를 확인한 메흐메트는 4월 18일, 첫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수비군의 배치

그동안 수비군은 성벽 위에 진지를 잡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네치아인들과 크레타인들은 해안 성벽과 블라케르나이 성벽의 방어를 담당했다. 그곳에서 케르코포르타까지의 방어는 주교 레오나르도스가 200명의 이탈리아 용병과 일부 제노바인들과 함께 책임졌다. 나머지 병력은 육상 성벽을 따라 배치되었고, 특히 아기오스 로마노스(성 로마누스) 문에는 정예 그리스인과 제노바인들이 자리했다. 프로폰티다(마르마라) 해안 성벽은 궁수 50명이 경비했다. 또한 루카스 노타라스 휘하에 500~700명 규모의 예비대가 편성되어, 위협받는 성벽 구역으로 신속히 달려가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첫 번째 대규모 습격

4월 18일 밤부터 19일로 넘어가는 밤, 메흐메트는 부대에 공격을 명령했다. 목표는 '돌파구'라 불리는, 포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뒤 임시로 보수된 성벽 구역이었다. 돌파구는 아기오스 로마노스 문 근처, 즉 방어선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에 형성되어 있었다.

갑자기 수백 개의 북소리가 밤의 고요를 깨뜨렸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끔찍한 함성을 지르며 돌파구로 돌진했다. 그러나 수비군은 즉시 일어나 격렬한 공격에 맞설 준비를 갖췄다.

이윽고 치열한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갈고리로 무장한 오스만군은 그리스인들의 임시 방어 시설을 파괴하려 틈새를 통해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다른 병사들은 성벽 잔해 위에 사다리를 세워 침입을 시도했다. 즉시 콘스탄티노스 황제와 유스티니아니가 정예 부대 및 예비대와 함께 공격 현장으로 달려갔고, 전투는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유스티니아니의 중장갑 병사들이 오스만군과 맞붙었다. 강력한 갑옷 덕분에 그들은 적의 투사 무기로부터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다. 반면 그들 앞에는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리스 예비대가 도착하자 모두 함께 반격에 나서 오스만군을 완패시켰고, 돌파구 밖까지 추격했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오스만군의 첫 번째 진지한 침입 시도였던 이 전투는 밤새 계속되었고, 그들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베네치아인 바르바로는 오스만군이 최소 200명의 사망자를 현장에 남기고 물러났다고 기록했다.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손실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반면 수비군은 단 한 명의 손실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는 바르바로의 서술과 달리, 슬라브 연대기의 익명의 모스크바 저자는 이 전투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슬라브 연대기의 기록

그는 이렇게 썼다. "정오에 오스만군이 두 번째 대포를 발사했는데, 유스티니아니 역시 마찬가지로 준비해 둔 대포로 오스만 대포를 향해 발사했고, 그 성공적인 일격 이후 화약이 든 부분이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메흐메트는 분노하여 야그마-야그마(yagma-giagma), 즉 '습격하라, 습격하라'라고 외쳤다. 동시에 그의 군대도 이 함성을 되풀이하며 육지와 바다로 공격을 감행했다. 반대편의 모든 수비군은 성벽으로 달려갔고, 도시에는 총대주교와 주교들, 성직자들만 남아 교회에 머물렀다."

"황제는 끊임없이 도시 전역을 누비며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용감하게 버틸 것을, 열정과 희망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고, 도시 전체에 종을 울리라고 명령했다. 사방에서 죽은 자들이 성벽에서 이삭처럼 쏟아져 내렸고, 피는 강처럼 흘렀다. 오스만군의 시신은 그들에게 다리이자 사다리가 되어주었다." 슬라브 연대기는 이 첫 공격에서 오스만군의 사망자가 35,000명을 넘었다고 기술하는데, 이는 상당히 과장된 숫자이며, 그리스와 동맹군의 사망자는 약 2,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의 정확성은 연대기가 언급한 심각한 오류 때문에 의심받는다. 포위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컬(세계) 총대주교좌에는 총대주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상 성벽에 대한 추가 공격

며칠 후, 오스만군은 먼저 프린스 제도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생사를 불문한 모든 것을 파괴한 뒤, 수비군이 그 적은 병력으로는 방어선 전체를 커버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해상 성벽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스만군은 심각한 손실을 입은 채 격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