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전후, 율리우스 아돌프 페터센(Julius Adolf Petersen)은 함부르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도둑 왕'이었다. 1922년 4월 20일, 이 부지런한 범죄자는 49건의 범행을 자백했다. 그의 생애는 훗날 "바름베크 경(Lord von Barmbeck)"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마르크-올리버 레어만(Marc-Oliver Rehrmann), NDR.de
"우리 집안에서는 항상 '바름베크 경'에 대해 좋게 이야기했어요." 2015년 NDR과 만난 아스트리드 마이어(Astrid Mayer)는 1920년대 초 전설적인 도둑 왕의 이야기를 생생히 전했다. 그의 본명은 율리우스 아돌프 페터센. 마이어는 이 '경'의 오랜 동반자이자 연인이었던 고모할머니 프리다 괴데(Frida Goedje)의 유품을 물려받았는데, 프리다는 1933년 함부르크 감옥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페터센과 평생을 함께했다. 이 문서들은 '경'의 사고와 행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그의 이야기는 1973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율리우스 아돌프 페터센 - '스타일' 있는 사기꾼
율리우스 아돌프 페터센은 생전에 이미 전설이었다. 함부르크 신문들은 이 교활한 도둑이자 탈옥수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다. 함부르거 프레멘블라트(Hamburger Fremdenblatt)지는 페터센이 한때 술집을 운영했던 함부르크 노동자 지구 '바름베크(Barmbeck, 1946년부터 'Barmbek'로 표기)'에서 따와 그에게 '바름베크 경'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페터센은 흠잡을 데 없는 옷차림을 중시했으며, 당시 사람들에 따르면 뻣뻣한 검은 모자 없이는 절대 외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매너와 재치 있는 언변은 당시 거친 범죄자들과 그를 확연히 구분 짓는 요소였다.
'바름베크 경' - 한자동맹의 로빈 후드?
"어릴 때부터 '바름베크 경'이 부자에게서 훔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아마 사실일 거예요." 고모할머니 프리다 괴데와의 대화를 통해 '경'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는 아스트리드 마이어는 말한다. "한 번은 바름베크의 한 백화점에서 놀고 있던 노동자 집 아이 다섯 명에게 새 옷을 사주고, '바름베크 경'의 안부 인사를 전하며 돌려보냈다는 얘기도 있죠." 그렇다면 율리우스 아돌프 페터센은 한자동맹 버전의 로빈 후드였을까?
13세에 첫 수감
훗날 '경'이 된 그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시가 공장 노동자였다. 1882년 10월, 페터센은 함부르크의 비좁은 지하 셋방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그는 13세의 나이에 5일 구금형을 선고받았다. 친구가 주운 지갑을 사탕 몇 개와 바꿔 가로챘다가 들킨 것이다. 교사가 교실에서 매질을 하자 잉크병을 집어던진 뒤 4주간 집을 나가지 못했고, 그 시기에 소매치기와 사기 행각을 배우며 대도시의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 4주 동안 나는 독을 마셨지, 잔뜩 독을 마셨다고." 훗날 '경'은 그렇게 회고했다. 결국 18세에 수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술집 주인으로서 경찰과 맞서다
1904년부터 1908년경까지 페터센은 바름베크에서 바텐더로 일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범죄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주인장 일을 하며 피했어야 할 손님들을 여럿 알게 됐지." 그는 회고록에 적었다. 경찰관이 손님을 연행하려 하자 이에 맞서 싸우고, 달려든 두 번째 경찰관까지 거칠게 거리로 내던진 일화는 범죄자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이 활극으로 나는 일대 범죄자들 사이에서 영웅이 됐어. 내 술집은 늘 만원이었고, 평범한 시민들은 발길을 끊고 수상한 무리들이 자리를 채웠지." 페터센의 회고다. 동생 아르놀트는 "도둑들과 석탄 노동자들의 엘도라도였으니까"라며 장사가 잘 된 이유를 설명했다.
페터센은 통금 시간 이후에도 새벽까지 술집에서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며 '특별한 공로'를 세웠다. "순찰 도는 경찰관들이 안에서 불이 켜진 걸 보지 못하게 검은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야 했지." 1908년 그는 다시 수년형의 선고를 받았고, 가족은 술집을 접어야 했다.
구세군 '금발 미녀'와 사랑에 빠지다
1973년 영화에서 주디 윈터(Judy Winter)가 연기한 헬미 페터센(Helmi Petersen), '바름베크 경'의 아내는 빼어난 미모로 유명했다.
여성들은 '경'의 삶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그가 야간 범행을 저지를 때 알리바이를 제공했고, 그 대가로 장물인 보석이나 현금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다. 술집 주인 시절, 그는 구세군의 '금발 미녀' 헬미에게 반했다. 적어도 회고록엔 그렇게 적혀 있다. 두 사람은 1911년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헬미는 상류 사교계를 드나들며 남편의 갱단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페터센은 아내의 과도한 요구가 자신을 더 많은 범죄로 내몰았다고 불평했다.
"이 여자에게 무의식적으로 묶여 있었다"
1915년 외아들 아돌프, 애칭 '하첼(Hatzel)'이 태어났다. '경'은 정서적으로 차가운 아내에게서 열정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며 고통받았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여자에게 무의식적으로 묶여 있었을까? 헤어지려 하면 영원한 밤 같았고, 그녀 주위엔 낙원이 있었지." 훗날 페터센의 회고다. 두 사람은 1차 세계대전을 함께 버텼다. 중간에 페터센이 다시 수감되기도 했지만, 그는 상습범으로 분류되어 징병되지 않았다. 전쟁 중엔 버터와 시가를 훔쳐 부족한 물자를 충당하기도 했다.
사랑에 빠진 야간 경비원, 우체국 털이
페터센 일당은 1920년 수잔넨슈트라세(Susannenstraße) 우체국(오늘날 샤첸피어텔 지역)을 털었다. 2015년 촬영된 사진으로, 현재 지점은 없다.
전쟁이 끝난 후 페터센은 전성기(?)를 맞는다. 그는 금고를 손으로 뚫는 전문가였거나, '침대 투어' 수법으로 집주인 침실 침대 옆 탁자에서 금고 열쇠를 훔치곤 했다. 가장 대담한 범행은 수잔넨슈트라세 6번 우체국 습격이었다.
1920년 9월 29일, 페터센과 공범 6명이 우체국에 잠입했다. 유일한 야간 경비원이 딴짓을 하고 있어 쉬웠다. "경비원이 어떤 아가씨와 연애 중이라 정신이 팔려 있었지." 페터센의 묘사다. 그들은 지하실 창문을 뜯고 들어갔다. "사랑에 미친 경비원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 아가씨가 나가자 당황한 경비원을 옷장에 가뒀다. "경비원과 악수하며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했지." 그리고 금고를 털었다. 믿기 힘든 장물: 현금 221,000마르크와 우표 335,000마르크어치.
서부극 스타일의 현금 수송차 강도
파름젠(Farmsen) 트로트 경기장의 현금 수송 마차를 서부극처럼 습격하는 장면. 1973년 영화 스틸컷. 마부가 총에 맞아 다쳤다.
같은 달, 페터센 일당은 파름젠 트로트 경기장의 현금 수송 마차를 노렸다. 달리는 마차를 서부극처럼 습격해 달아났다.
페터센의 이름은 함부르크 신문들, 특히 함부르거 프레멘블라트에 오르내렸다. '경'은 평판을 걱정해 대담한 행동을 감행한다. 신문사 편집국에 직접 찾아가 현금 수송 강도 연루 의혹을 조롱조로 부인한 것이다. "전 상인일 뿐, 그 일과 무관합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전 도둑이 아니라 탈옥수예요! 마지막 범죄를 저지른 지 12년이나 됐습니다." 신문은 다음 날 즉각 반박문을 실었다. 편집진이 '바름베크 경'의 연기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그가 챙긴 트로트 경기장 장물 분배금: 40,000마르크.
장물로 연인의 연금술집을 사주다
1921년, 페터센이 훔친 돈 10만 마르크로 연인 프리다 괴데에게 사준 콜로나덴(Colonnen) 거리의 연금술집(펜지온). 2015년 촬영. 알스터 호수 근처다.
'경'은 이제 부자였다. 불법 도박장 운영도 계속했다. 하지만 생활은 비교적 검소했다. 1921년 1월, 장물 일부로 연인 프리다 괴데에게 알스터 호수 인근 콜로나덴 거리의 연금술집을 10만 마르크에 사주었다. 헬미와의 결혼은 이미 파탄 났고, 1921년 봄 이혼했다. 프리다 괴데는 어린 시절 이웃으로 알던 사이였고, 1차 대전 후 재회해 연인이 되었다. 그는 주로 그녀와 연금술집에서 지냈고(방이 비어 있을 때), 야간 범행 후 장물을 이곳에 가져와 처분했다.
옷장에서 체포되다
프리다 괴데는 이 시기를 떠올리기 싫어했다. "내가 연금술집 살림을 다 맡아야 했어. 그가 날 죄인처럼 가뒀지." 1921년 말 편지에 적었다. 페터센은 투숙객들에게 자신을 프리다의 남동생 아돌프라고 속였다. 몇 달간 연금술집에 살던 한 여성은 페터센이 프리다를 구타하고 학대했다고 증언했다. "내 생각엔 그녀가 완전히 그의 지배하에 있었어." 경찰 진술이다. 우연이 아니게도, 1921년 6월 페터센은 속옷 가게 털이 범행 후 이 연금술집에서 체포됐다. 프리다가 문을 열어주며 그가 없다고 잡아뗐지만, 경찰은 물러서지 않고 "옷장에서 막 나오던" 페터센을 잡았다. 프리다도 함께 체포됐다.
미국인 약혼자라는 꾸며낸 이야기
심문에서 프리다 괴데는 처음에 연금술집 자금이 미국인 약혼자 존 블랙(John Black)이 준 돈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도시 출신인지는 모른다며, 함부르크와 미국을 오가며 1차 대전 직전 8만 마르크를 위기 대비용으로 줬다고 했다. 훗날 프리다는 이 '동화'를 번복하며 페터센이 사준 것임을 인정했다. 미국인 약혼자란 애초에 없었다.
소변으로 쓴 비밀 메시지
경찰이 수년간 추적 끝에 '바름베크 경'을 잡았다. 하지만 페터센은 순순히 자백하지 않았다. 옥중에서 속옷 가게 털이 알리바이를 조작했다. 범행 시각에 누이의 약혼식에 있었다고 꾸민 것이다. 어머니 집에선 파티가 없었지만, '경'은 날짜가 새겨진 약혼반지까지 만들어 가족들과 입을 맞췄다. 결국 탄로 났다. 그는 수차례 옥중에서 비밀 메시지를 빼돌렸는데, 상당수가 소변으로 쓴 글(소변 문자)이었다. 간수들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경', 5개월간 고문용 족쇄 차다
"거의 2년 예심 구금 중 첫 10개월간 나는 예심 판사와 치열하게 싸웠다." 페터센의 회고다. "밤마다 채워진 족쇄로 손목이 부어터지고 뼈가 부러질 지경이 됐는데도, 원하는 자백을 받아내기엔 정신적으로 충분히 굴복시키지 못했어. 검시관이 15파운드 족쇄가 소용없음을 확인하자 판사는 전술을 바꿨다. 공범들의 나를 공범으로 지목하는 자백 내용을 모두 내게 공개했다. 그래도 자백하지 않았다."
프리다 괴데의 자백: "그가 내게 불운을 가져왔다"
수개월 독방 생활 끝에 프리다 괴데가 자백하고 '바름베크 경'과 결별했다. 나중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연인 프리다 괴데가 자백했다. 독방에서의 수개월이 그녀를 무너뜨렸다. 1921년 11월, 그녀는 입을 열었다. "페터센의 주술에 너무 깊이 빠졌고, 증언하면 그가 내게 해코지할까 봐 두려웠기에 더 일찍 말하지 못했어요." "오늘 나는 페터센에게 그저 수단에 불과했음을 압니다." 예심 판사에게 페터센과 완전히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너무 많은 불행을 안겨줬어요." 하지만 프리다는 어디까지 알았을까? 검찰은 그녀가 "그의 삶과 활동 전반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반면 페터센은 자신이 도둑질을 숨겨왔다며 연인을 감쌌다. 프리다는 당시 이렇게 적었다. "페터센 평판이 안 좋은 건 כנראה 알았을 거야. 하지만 모든 범죄 사실은 체포된 뒤에야 알았어." 프리다는 13개월 구금 후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왜 '경'은 1922년 자백했나?
페터센은 마침내 저항을 포기했다. 1922년 4월 20일, '바름베크 경'은 포괄적 자백을 한다. 최근 몇 년간 함부르크에서 저지른 49건의 범죄를 상세히 기술하고, 각 범행의 공범들과 수법을 낱낱이 기록했다.
페터센이 결국 자백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회고록에서도 침묵한다. 다만 몇 주 전, 역시 수감 중이던 동생 아르놀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만 풀려나면, 내가 했든 안 했든 모든 걸 자백하겠어." 어머니도 아들의 장물을 보관했다는 혐의로 수개월째 수감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심 판사가 그런 약속을 지킬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물었다. "조만간 어머니 석방이 확실해지면, 우리 둘 다 자백하자. 누구도 감싸지 말고. 우리 운명을 남자답게 짊어지자."
공범들의 자백으로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는 전면 자백을 택했다. "내 자백은 모든 판사들에게 거의 기적 같은 효과를 냈어." 페터센의 회고다. "감옥 문이 열렸고, 1922년 여름엔 매일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었지." 적어도 그해 가을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가는 곳마다 화제의 중심이었다"
페터센 일당의 재판은 함부르크 형사법원 건물에서 열렸다.
'바름베크 경' 재판은 함부르크를 발칵 뒤집었다. 신문들은 자극적인 기사로 세부 사항을 떠들어댔다. 페터센은 썼다. "내 자백은 큰 대중적 파장을 일으켰다. 가는 곳마다 호기심과 화제의 대상이었고, 선정적 신문 보도가 이를 부추겼다." 각 범죄별로 개별 선고가 내려졌다. 예컨대 우체국 털이는 징역 6년. 개별 형량을 합치면 50년을 넘었다. 하지만 1924년 개별 형량이 합쳐져 총 징역 15년으로 확정됐다.
"판결 2년 후, 나를 보러 면회객들이 왔다." 1927년 풀스뷔텔 감옥에서 쓴 회고록에 적혀 있다. "심지어 상원(시 정부)에서도 날 부르더군. 지금, 7년을 복역한 뒤 내 기억은 흐려졌다. 호기심도 충족됐고."
'바름베크 경', 기회를 얻다
1932년 4월, 페터센은 감옥 밖 생활을 할 기회를 얻는다. 모범수로 6개월 '시험 석방'을 허가받아 3년여 형기를 남기고 출소했다. '경'은 거듭 과거와 결별했음을 주장했다. 프리다 괴데의 연금술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래 범죄 세계에서 발을 빼진 못했다. 1933년 6월 다시 체포됐다. 도둑 에른스트 하낙(Ernst Hannack)과 손잡고 동생 아르놀트와 위조지폐단을 꾸렸다는 혐의였다. 페터센은 위조지폐 혐의를 부인했다.
최후의 발악 - 감방에서 목매다
1933년 가을, 페터센은 함부르크 장 요한니스 교회에서 하낙을 경찰에 넘기려 했으나 실패했다.
7월 석방됐다. 아마도 하낙을 자수시키겠다는 약속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함부르크 하르베스테후데 지구에서 만난 하낙이 페터센에게 총을 쏘고 도주한 것이다. 이틀 후인 10월 26일, 둘 다 체포됐다. 함부르거 프레멘블라트는 "이미 체포된 강도살인범 하낙과 여러 건의 절도를 저지른 혐의가 짙은 51세 아돌프 페터센이 어제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4주 후, '바름베크 경'은 감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1933년 11월 21일. 간수가 발견했다. "페터센은 양말 두 켤레와 손수건을 묶어 환기구 고리에 목맸습니다." 간수 보고서다.
"그는 철저한 범죄자였다"
왜 페터센은 자살을 택했나? 사망 몇 시간 전 심문에서 그는 다시는 석방되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당시 나치당이 시정을 장악한 상태였다. "상습범인 그가 나치 치하에서 석방될 리 없었을 겁니다." 작가 위르겐 엘러스(Jürgen Ehlers)는 수년 전 이렇게 말했다. 엘러스는 2008년 '바름베크 경' 저서를 집필하며 함부르크 주립문서보관소 자료 등을 조사한 뒤, 1932년 석방 후 페터센이 진심으로 성실한 시민으로 살려 했는지 회의적이다. "그가 정직한 시민으로 자리잡으려 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자동맹의 로빈 후드나 신사다운 범죄자라는 이미지도 엘러스의 조사 결과와 맞지 않는다. "신사인 척하려 했지만, 신사는 아니었어요. 그는 철저한 범죄자였습니다."
회고록, 1973년 첫 출간
사후 '바름베크 경'은 빠르게 잊혔다. 필사체로 쓴 회고록은 1973년에야 출간됐다. 2차 대전 공습으로 원고가 소실된 줄 알았던 것이다. 같은 해 NDR이 6부작 라디오 드라마를 방송했고, 배우 우베 프리드리히젠(Uwe Friedrichsen)이 '바름베크 경' 역을 맡았다. 오프닝 크레딧엔 작가의 "놀라운 서사 재능"이 언급됐다. 마르틴 뤼트게(Martin Lüttge) 주연 영화 바름베크 경(Der Lord von Barmbeck)도 1973년 개봉해 연방영화상 2개와 밤비상(Bambi) 최우수 독일 영화상을 받았다. 그렇게 '바름베크 경' 전설이 되살아났다.
오랜 묘지 찾기
율리우스 아돌프 페터센이 어디 묻혔는지는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함부르크 올스도르프(Ohlsdorf) 공동묘지? 묘지 관리소에 따르면 NDR이 2015년 취재 당시 오랜 수색을 벌였으나 문서 기록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NDR.de가 아스트리드 마이어(프리다 괴데의 외증손녀) 소장 문서에서 묘지 안내장을 찾아냈다. 문서에 따르면 '바름베크 경'은 1933년 11월 말 올스도르프 묘지에 안장됐으며 정확한 묘역도 기록돼 있었다. 1959년 사망할 때까지 프리다 괴데(결혼 후 프리다 레게저 Frida Regeser)가 묘지 관리를 맡았다. 비석은 남아 있지 않다. 문서 기록상 1963년 묘지가 이장됐다.
사진 속 손
이별의 징표: 프리다 괴데가 사진에서 자신을 오려냈다.
프리다 괴데의 유품과 '바름베크 경'의 마지막 문서를 보관 중인 아스트리드 마이어는 몇 년 전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임종 전 제게 말씀하셨어요. '이 물건들 잘 간수해라.'" 유품엔 개와 함께 찍은 고모할머니의 흑백 사진 여러 장이 있다. 그리고 율리우스 아돌프 페터센의 유일한 현존 사진(이전엔 리터칭된 버전만 알려짐). 의자에 앉아 정장을 입은 페터센 뒤로 낯선 이의 손이 보인다. "이게 고모할머니 손이에요. 나중에 사진을 오려내셨죠." 마이어의 설명이다.
감옥에서 뜬 코바늘 담요
마이어는 고모할머니가 옥중에서 뜬 코바늘 담요를 물려받았다. 1970년대엔 잠시 프리다 괴데의 연금술집 운영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하긴 너무 힘들어서 결국 팔았어요." 마이어의 말이다. '바름베크 경'이 장물로 마련한 그 연금술집은 여전히 콜로나덴 거리에 있다. 몇 집 건너 새 주인 손에 넘어갔지만, 옛 이름 그대로다. "엣 디 에스플라나데(At the Esplan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