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는 1599년 6월 6일 일요일,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르투갈계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바와 귀족 가문 출신 도냐 헤로니마 벨라스케스의 아들로, 8~9일 후 산 페드로 성당에서 변호사 그레고리오 데 살라사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대부는 마그달레나 지구 이웃 파블로 오헤다였으며, 그는 잔치를 벌이고 종을 울리며 아이들에게 동전을 뿌리는 등 성대하게 축하했다.
교육과 수련
어릴 적부터 놀라운 데생 실력을 보인 디에고는 성미가 까다롭고 제자들에게 구타를 일삼던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의 공방에 들어갔다. 이를 견디지 못한 소년 디에고이토는 부모에게 다른 스승을 청했고, 1610년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문하로 들어갔다. 파체코는 대 화가는 아니었으나 탁월한 교육자이자 인격자였다. 그는 제자의 비범한 재능을 간파하고 자신의 기량을 아낌없이 전수하되, 제자의 개성과 취향을 강요하지 않았다. 1617년 파체코와 후안 데 우세다 앞에서 치른 시험을 통과한 벨라스케스는 '마에스트로(장인)' 칭호를 얻었다. 이듬해 스승의 딸 후아나 파체코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미모도 지성도 뛰어나지 않았으나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깊은 사랑을 바쳤다. 훗날 누군가가 파체코에게 '그런 천재의 장인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시겠군요'라고 하자, 그는 '제 스승이 된 영광이 더 큽니다'라고 겸허히 답했다. 파체코는 저서에서 "5년간 가르친 제자에게 딸을 준 것은 그의 덕행과 천재성 때문이며, 스승의 명예가 사위의 명예보다 크다.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레오나르도에게 라파엘로, 조르조네에게 티치아노, 플라톤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듯"이라고 기록했다.
궁정 화가로의 발탁
수련 시절의 작품으로는 달걀을 튀기는 노파, 포도 수확하는 여인, 세비야의 물장수 등 정물·풍속화와 성 일데폰소에게 수의를 전하는 성모, 동방박사의 경배, 수태고지 등 당대의 감상적 종교화가 남아 있다. 하지만 세비야의 분위기 속에 갇혀 있던 벨라스케스를 파체코가 마드리드로 떠밀었다. 1622년 첫 상경 때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비야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올리바레스 백작공작(가스파르 데 구스만)의 추천서로 다시 궁정에 들어갔다. 펠리페 4세는 예술 애호가였으며, 올리바레스는 벨라스케스에게 왕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결과에 감탄한 왕은 그를 '전속 초상화 화가'로 임명하고 궁전 거처를 내주었다. 이 시기 올리바레스 백작공작 초상(뉴욕 히스패닉 소사이티 소장), 돈 카를로스 왕자 초상, 펠리페 4세 첫 기마상(1734년 알카사르 화재로 소실) 등을 남겼다.
첫 이탈리아 여행 (1629~1631)
1627년 펠리페 3세의 모리스코 추방령을 그리는 경연에서 벨라스케스가 우승해 궁정 시종과 알카사르 내 넓은 작업실을 하사받았다. 이 작업실에서 지리학자(루앙 미술관蔵), 호박 따는 아이들(쿡 컬렉션蔵), 첫 대형 신화화 주정꾼들(바쿠스의 축제) 등이 탄생했다. 1628년 외교 사절로 마드리드에 온 루벤스가 벨라스케스에게 이탈리아행을 강력히 권유했다. 간청 끝에 1629년 6월 26일 바르셀로나에서 출항, 제노바를 거쳐 베로나·베네치아·페라라·볼로냐·로레토·로마·나폴리를 순례했다. 이 여정에서 그는 붓을 거의 들지 않고 눈과 지성을 채웠으나, 현대 미술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요셉의 튜닉(에스코리알蔵)과 불카누스의 대장간(프라도蔵) 두 대작을 그렸다고 본다.
궁정 복귀와 '왕국의 전당' 장식
왕과 올리바레스의 긴급 소환으로 꿈을 접고 귀국한 벨라스케스는 알카사르에 칩거하며 본격적인 궁정 화가로서의 임무를 시작했다. 채찍질 당한 그리스도(런던 내셔널 갤러리蔵),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마드리드 산 플라시도 수녀원蔵), 천사의 위로를 받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오리우엘라 대성당蔵) 등 종교화 세 점을 그린 뒤, 올리바레스가 펠리페 4세에게 바치는 '부에나 레티로 궁전 왕국의 전당' 장식화 의뢰를 받았다. 이곳을 위해 브레다의 항복, 펠리페 4세와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기마상(눈 덮인 과다라마 산맥 배경), 올리바레스 백작공작 초상(에르미타주蔵), 후안 마테오스·이페냐리에타 가족·파블리요스 데 바야돌리드 초상, 성 안토니오와 성 바울로 등을 제작했다. 1644년 아라곤 원정 때 왕을 수행하며 그린 홍색 깃발을 든 펠리페 4세(뉴욕 프릭 컬렉션蔵)은 붉은색과 은색의 교향곡 같은 걸작으로 꼽힌다. 이후에도 베나벤테 백작공작, 보르하 추기경, 부채를 든 여인, 그리고 궁정 난쟁이·광대 초상 연작(돈 세바스티안 데 모라, 엘 프리모, 바예카스의 아이, 코리아의 보보, 이솝과 메니포스) 등 '비참하면서도 감동적인 인간성'을 고전적 상징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쏟아냈다.
궁정의 총아, 신분 상승
1634년 외동딸 프란시스카가 수제자 후안 바우티스타 델 마소와 결혼했다. 마소는 느리고 엄격하며 스승과 장인을 숭배하는 인물이었다. 벨라스케스는 시종직을 마소에게 물려주었다. 1642년 카탈루냐 진압 원정에 동행해 마소와 함께 사라고사 전경을 그렸다. 1643년 올리바레스가 실각해 로에체스로 유배됐으나, 벨라스케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왕과 귀족들로부터 진심으로 사랑받으며 '궁정의 하인'이 아닌 '궁정의 신사'로 대우받았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그를 "가끔 붓을 드는 신사… 담담하고 말없으며 사려 깊고 온화한 성품, 욕심도 허영도 없이 천천히 그림을 완성하고 끊임없이 고쳐 그리며, 궁정이라는 복잡한 세계에서 인류의 빛을 캐내 캔버스에 옮긴 사람"이라고 평했다.
작품 수집을 위한 여행과 두 번째 이탈리아행
1644년 프랑스가 레리다를 포위하자 펠리페 4세는 군복 차림으로 출전했고, 벨라스케스는 프라가의 한 저택에서 사흘 넘게 왕의 초상을 그려 마드리드로 보냈다. 1634년까지 시종, 1643년까지 의복 담당, 1648년까지 시종장 보좌를 지낸 그는 그해 알카사르 옛 탑을 개조해 팔각실을 만드는 공사 감독관이 되었다. 후세페 마르티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왕이 '그림 갤러리를 만들고 싶으니 명화를 골라오라'고 하자 벨라스케스는 "폐하께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그림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로마와 베네치아에 가서 티치아노, 베로네세, 바사노, 라파엘로 등의 진품을 구해오겠습니다. 하층 방들은 고대 조각으로 채우고, 없는 것은 본을 떠서 스페인에서 주조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왕은 흔쾌히 허락했고, 1648년 11월 16일 마드리드를 떠나 1649년 1월 21일 말라가에서 출항했다. 충복이자 화가인 후안 데 파레하가 동행했으며, 벨라스케스는 그를 모델로 후안 데 파레하 초상(메트로폴리탄 미술관蔵)을 남겼다.
이탈리아 순방과 인노첸시오 10세 초상
밀라노·파도바·볼로냐·피렌체·모데나·파르마·로마·나폴리를 돌며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으나 다수는 소실됐다. 올림피아 마이다르키니(교황 처조카), 플라미니아 트리움피 화가, 팜필리 추기경 등 다수의 초상을 의뢰받았다. 그중 단연 백미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 초상이다. 레이놀즈 경이 "로마가 간직하는 가장 아름다운 캔버스"라 극찬한 이 작품 앞에서 교황과 바티칸 궁정은 경탄했고, 교황은 거대한 금메달이 달린 굵은 금목걸이를 하사했다.
왕의 간절한 귀국 요청
벨라스케스는 2년 반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며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롭고 찬란한 시간을 보냈다. 펠리페 4세는 여러 사절을 통해 '매우 호화로운' 서신들을 보내 급히 돌아오라 재촉했다. 이 편지들은 군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친구이자 동경하는 화가를 그리워하는 군주의 다정한 음성이었다. 왕은 인판타도 공작에게 "벨라스케스의 천성적인 게으름을 부추기지 말라", 오냐테 백작에게 "돈이 부족하면 채워주라. 핑계 대며 여행을 미루지 말라. 육로로 가면 놀러 다닐 테니 배로 오라"고 지시했다. 귀국 후 왕은 아무런 질책 없이 포옹과 축하만 건넸다.
회화 양식의 완성: 빛과 붓터치의 마술
귀국 후 펠리페 4세, 두 번째 왕비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갓 태어난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 수요가 쇄도했다. 공주 탄생 축하 행사로 밀린 급료 33,337 레알을 받았고, '자신의 천직에 딱 맞는다'던 궁정 가옥장(집사장)에 임명되어 왕의 모든 행차에 동행하며 숙소를 챙겼다. 궁정 의무가 산더미였음에도 벨라스케스는 짬짬이 걸작을 남겼다. 라푸엔테 페라리는 "그의 회화는 점점 더 유려해지고 입체감이 사라지며, 선의 정밀함이 빛의 기능으로 대체된다.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빛, 특정한 공간과 순간에 포착된 빛을 순수한 색채와 명암의 가치로 옮기는 것이 주목표가 된다. 느슨하고 예민한 붓터치가 선을 의식하지 않고 캔버스에 빛을 고정한다. 붓터치와 명암이 빛의 수단이 되어, 소묘·선·아라베스크·원근법·기하학적 공간 번역 등 회화의 학문적 틀을 모두 반액체 상태의 물감 덩어리 속에 녹여냈다. 이는 서양 회화사가 도달한 미지의 정점"이라고 분석했다. 이 경지는 로마에서 그린 메디치 별장 풍경화들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빛, 공기, 유려한 붓터치가 부분의 정밀함 대신 전체의 인상을 포착하며, 낭만적 멜랑콜리와 인상주의적 시선의 완벽한 요약이다.
만년의 3대 걸작
후계자가 없던 펠리페 4세는 딸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정략결혼을 위해 초상화를 유럽 각국에 보냈고, 벨라스케스는 여러 버전을 그렸다. 공주는 어머니 이사벨 데 보르본의 미모와 온화함을 물려받았다. 새 왕비 마리아나와 그 소생인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 마르가리타 공주(금발에 검은 눈, 은빛과 장미빛 드레스 차림) 초상도 수없이 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 진정한 불멸의 걸작은 세 점이다: 거울의 비너스, 시녀들(Las Meninas), 직녀들(Las Hilanderas).
거울의 비너스 (Rokeby Venus)
스페인 고전 회화에 극히 드문 누드화다. 모델은 광대 후작 엘리체의 정부였던 여배우 다미아나라는 설이 있다.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蔵.
직녀들 (Las Hilanderas)
대기와 색채가 주역인 작품. 마드리드 산타 이사벨 거리의 태피스트리 공장 내부에서 착안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그림의 신화적 독해를 처음 제시했다: 배경 태피스트리에 아라크네와 팔라스 신화가 작게 그려져 있고, 전경의 직녀들이 우리 운명의 실을 잣는 모이라(파르카이)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시녀들 (Las Meninas)
이를 능가하는 찬사는 없을 것이다. 벨라스케스가 왕과 왕비를 그리고 있을 때(거울에 비친 둘), 금발의 마르가리타 공주가 시녀들과 난쟁이들, 몰로서스 개를 데리고 방으로 뛰어든다. 공주는 침묵한 채 부모를 바라보고, 캔버스를 친숙하게 쳐다본다. 엄숙함 없는 가정적 친밀감. 열린 뒷문으로 궁정 신하 한 명이 나가다 뒤돌아본다. 전경 좌측엔 뒷면이 보이는 대형 캔버스와 이젤, 그 앞엔 팔레트와 붓을 든 벨라스케스 자신이 서 있다. 그는 왕들을 바라보고 있다—바로 지금 우리가 그림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서.
죽음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스페인-프랑스 전쟁이 끝났다. 10월 16일 루이 14세 특사 아그라몽 공작이 마드리드에 입성해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청혼을 요청했다. 궁정 가옥장으로서 벨라스케스는 특사의 부엔 레티로·엘 파르도·에스코리알·귀족 저택 방문 일정을 모두 수행했다. 프랑스 사절단이 떠날 때 금시계(다이아몬드 장식)를 선물로 받았다.
1660년 3월, 펠리페 4세가 딸을 프랑스 국경 이룬까지 호위하러 떠날 때 벨라스케스는 선행대장으로 북상했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과달라하라·바야돌리드·부르고스·비토리아·산세바스티안·푸엔테라비아까지 왕실 숙소를 준비했다. 6월 8일 귀경길에 오른 그는 마드리드 도착 직후 현기심, 심계항진, 속쓰림으로 앓아누웠다. 왕이 어의를 보냈으나, 1660년 8월 6일 금요일, 성체를 영하고 선종했다. 산 후안 바우티스타 교구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