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864년 독일-덴마크 전쟁: '신의 이름으로' 시작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분쟁의 모든 것

1864년 2월 1일,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작령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덴마크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으며, 같은 해 안에 종결되었습니다.

글: 카리나 베르너(Karina Werner)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은 덴마크 전역이 독일의 지배에 놓일까 두려워했고, 반면 테오도르 폰타네(Theodor Fontane)는 독일 동포들이 거둔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1864년 2월 1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슐레스비히를 침공하면서 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의 귀속을 둘러싼 이 전쟁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영원한 '불화의 씨앗',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역사는 복잡하지만 그만큼 다사다난합니다. 이 지역을 영원한 '불화의 씨앗'으로 만든 결정적 요인은 바로 북해와 발트해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입니다. 1815년 빈 회의는 이미 1806년에 해체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홀슈타인 공국을 새로 출범한 독일 연방의 회원국으로 규정했지만, 슐레스비히 공국은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공작령은 계속해서 덴마크 왕의 동군 연합(personal union) 아래 통치되었고, 수세기에 걸쳐 그래왔던 것처럼 덴마크 국가의 일부로 남았습니다. 1815년 이후 덴마크는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더 긴밀히 묶으려 시도했고, 이는 홀슈타인으로부터의 강력한 분리를 의미했습니다. 반대 진영에서는 통합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독일 연방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1852년 런던 의정서

갈등의 구도는 1848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발발하면서 굳어졌습니다. 독일 연방의 여러 주들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편에 서서 덴마크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독일 연방군이 철수하자 덴마크는 1851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라우엔부르크에 대한 주권을 유지했습니다. 다만 1852년 런던 의정서에 따라 덴마크는 두 공작령을 국가 내의 독립적 존재로 인정할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슐레스비히를 왕국에 직접 편입하는 것은 명시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1863년 11월, 갈등이 정점에 이르다

북해와 발트해 사이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둘러싼 전쟁을 반복해서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긴장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쟁점은 슐레스비히 주민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북부에는 덴마크인이, 남부에는 독일인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덴마크의 '민족 자유주의자'들은 공작령을 덴마크 민족국가로 통합하기를 원했고, 독일인들은 자유 헌법과 완전한 독일어 사용을 전제로 미래의 독일 제국으로의 통합을 요구했습니다.

덴마크 왕 프리드리히 7세가 갑작스럽게 서거한 지 사흘 뒤인 1863년 11월 18일, 새 국왕 크리스티안 9세 치하의 덴마크는 홀슈타인 공국과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전체 국가 헌법에서 제외하는 소위 '11월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나머지 슐레스비히가 덴마크 왕국에 통합됨을 의미했으며, 런던 의정서 위반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프로이센에게 결코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프로이센 총리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인들의 분노를 활용해 덴마크와의 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1863년 12월 초, 양 강대국은 덴마크에 대해 '연방 처형'을 공동 선언했습니다. 법적으로 덴마크가 연방 규칙을 위반했으므로 군사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2월 23일부터 31일까지 독일군은 라우엔부르크와 홀슈타인으로 진군해 킬 근처의 아이더선(Eider-Linie)까지 진격했습니다. 1864년 1월 16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11월 헌법 폐지를 요구하는 48시간 최후통첩을 덴마크에 보냈지만, 덴마크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1864년 2월 1일, 전쟁 발발

'신의 이름으로(Im Namen Gottes)' — 이것은 1월 31일 저녁, 야전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브랑겔(Friedrich von Wrangel)이 내린 명령이었습니다. 2월 1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아이더 강을 건너 슐레스비히로 진군했습니다. 양군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미스운데(Missunde) 인근에서 슐라이(Schlei)를 건너려 했으나 처음에는 실패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다네베르크(Danewerk, 덴마크어: Danevirke)'를 향해 행군했습니다. 이 거대한 중세 요새는 그동안 덴마크인들이 넘을 수 없다고 여겨온 방어선이었습니다. 그러나 덴마크군은 오스트리아군 앞에서 다네베르크에서 후퇴했고, 눈과 얼음으로 인해 결국 이 진지를 포기하고 뒤펠(Düppel)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많은 덴마크인들은 요새를 무혈로 내준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뒤펠러 샨첸(Düppeler Schanzen) 공격

오늘날 덴마크 존데르보르그(Sønderborg) 마을 뒤펠레르 언덕에 세워진 역사 센터는 이 전쟁을 기리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전투는 플렌스부르크 피오르(Flensburg Fjord)와 알젠순트(Alsensund) 사이에 위치한 덴마크의 유명한 요새, 뒤펠러 샨첸에서 벌어졌습니다. 덴마크군은 이 요새에 숨어 몇 주 동안 프로이센군의 포위를 버텼습니다. 그러나 4월 18일, 프로이센군은 마침내 뒤펠러 샨첸을 강공하는 데 성공합니다. 총검, 소총, 대포가 오간 짧고도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이 이어졌습니다.

덴마크 군인 디데릭 요한센(Diderik Johansen)은 '1864년 전쟁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자신의 전쟁 일기에서, 독일인과 덴마크인 사이의 증오가 모든 병사들을 온전히 지배하지는 않았음을 증언합니다. 전투가 잠시 중단된 동안 양측 군인들의 만남은 '매우 우호적'이었고, 심지어 서로의 보급품을 나누어 먹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덴마크군은 패배했고, 전쟁의 승패는 사실상 기울었습니다.

덴마크군의 항복

그럼에도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덴마크의 프레데리시아(Fredericia) 요새를 공격했고, 헬고란트(Helgoland)에서는 해전이 벌어져 덴마크가 승리했습니다. 한편 1852년 런던 의정서에 서명한 7개국이 런던에서 회의를 열면서 5월 12일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회의는 결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프로이센이 언어 경계선에 따라 슐레스비히를 분할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덴마크가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은 재개되었습니다. 6월 말, 프로이센군은 마침내 알스(Als) 섬으로 도하하는 데 성공해 섬 전체를 점령했고, 덴마크군은 철수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이 유틀란트 북부로 진격하면서 덴마크군은 항복했습니다.

비엔나 평화 협정 — 덴마크, 영토를 양도하다

1864년 10월 30일, 프로이센·오스트리아·덴마크는 비엔나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라우엔부르크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할양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덴마크는 약 백만 명에 달하는 주민과 전체 영토의 3분의 1을 잃었습니다. 이어 1865년 8월 14일의 가슈타인 협약에서 프로이센은 작센-라우엔부르크와 슐레스비히 공작령을 획득했고,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옛 동맹 오스트리아를 끊임없이 도발했고, 결국 1866년 '독일 전쟁'을 촉발시켰으며 이 전쟁은 빠르게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1866년 8월 '프라하 평화 조약'을 통해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고, 세 지역은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는 자체적인 작은 독일 국가 건설을 희망했던 많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민들의 바람과는 어긋난 결과였습니다.

20세기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슐레스비히는 분열된 상태로 남았습니다. 1920년 국민투표를 거친 뒤 북슐레스비히는 덴마크에, 남슐레스비히는 독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어진 국경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덴마크 점령으로 잠시 그 의미가 중단되긴 했지만,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2004년에는 독일군과 덴마크군이 함께 다네베르크(Danewerk)의 14번 고지를 재건한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현재 독일-덴마크 국경 지역 주민 대부분은 이곳이 평화로운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