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계 오스만 대사, 무수로스
콘스탄티노스 무수로스(Konstantinos Moussouros)는 솔직히 말해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 태생으로, 크레타 뿌리를 가진 대규모 파나리오테(Phanariot) 가문의 후손이었다. 1807년에 태어난 그는 1840년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주재 초대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수로스는 행동 면에서 터키인들보다 더 터키답다고 평가될 만했다. 그는 자신의 혈족인 그리스 국가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술탄의 이익을 옹호했다. 아테네 재임 기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외교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때마다 아테네 주재 영국 대사이자 오톤 왕의 숙적이었던 음모가 라이언스(Lyons)와 공모했다.
적대 행위의 배경
한 견해에 따르면, 무수로스는 동포를 편든다는 비판을 터키 측에서 받지 않기 위해 그리스에 대해 그토록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변명만으로는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부족하다. 결국 양심과 충돌한다면 사임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결핍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양심에서.
카라타소스 여권 거부 사건
1847년 1월 25일, 오토 국왕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차미스 카라타소스(Tsamis Karatassos)가 이스탄불 방문용 여권을 요청하며 대사관의 무수로스를 찾았다. 그러나 무수로스는 카라타소스가 과거 마케도니아에서 터키에 맞선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무수로스의 거부는 무엇보다도 오토 국왕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이었다. 그리하여 1월 27일 무수로스가 궁전 리셉션에 초대받았을 때, 오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사여, 그리스의 왕은 더 큰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왕은 일부러 그 자리를 떠났다.
외교 관계의 단절
무수로스는 이 에피소드를 그냥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포를 해칠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라이언스의 지시에 따라 그는 리셉션에서 일부러 퇴장하여 실제 심각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외교 소동을 일으켰고, 즉시 터키 상관들에게 보고했다.
술탄은 그리스를 굴욕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테네에 공개 사과를 요구했지만, 당시 총리 요안니스 콜레티스(Ioannis Kolettis)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의 거부에 따라 무수로스는 2월 3일 그리스를 떠났고, 이로써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간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같은 해 8월, 터키는 외교 관계는 물론 상업 관계까지 포함한 그리스와의 모든 교류를 끊었고, 이는 아테네에 큰 타격을 안겼다. 마침내 총리 콜레티스가 사망한 후, 그리스에 쓴약에 설탕을 입힌 듯한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그리스 정부가 오스만 제국이 아니라 무수로스 개인에게 사과하고, 별도로 술탄에게도 서한을 보낸 것이다.
암살 미수 사건
무수로스는 1848년 2월 8일 아테네로 돌아왔지만, 그리스와의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48년 4월 23일, 터키 대사관 하인 아포스톨로스 나디리스(Apostolos Nadiris)가 무수로스를 살해하려 했다. 그는 "그가 그리스인들을 험담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고 선언했다.
무수로스는 팔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나디리스가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그리스가 그를 터키 측에 인도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외교 사건이 촉발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인들에 대한 터키의 보복이 이어졌다.
그의 최후
마침내 이 사건은 수습되었고, 무수로스는 빈 주재 오스만 대사관으로 전근되었다. '그리스인' 외교관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난 그리스인들은 크게 안도했다. 무수로스는 이후 런던에서도 근무했으며, 터키로부터 파샤 칭호를 받았다. 그는 1891년 폴리스(콘스탄티노플)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