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요구와 자본주의적 성과 압박에서 벗어나: 1920년대 메클렌부르크, 홀슈타인, 뤼네부르크 헤데에 나체주의(FKK) 시설들이 들어섰다. 일부 정착민 가족은 '융뫼을(Jungmöhl)'에서 연중 내내 거주하며 이상적인 삶을 실험했다.
시대적 배경: 생활 개혁(Lebensreform) 운동의 태동
1900년 이후 독일의 대도시는 소음, 먼지, 인파로 지옥과 다름없었다. 이에 맞서 '생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회 개혁 운동은 산업화에 대한 대항 운동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를 외쳤다. 채식 위주의 식단, 신체 단련, 일광욕이 핵심 실천 사항이었으며, 금주와 금연 또한 기본 원칙이었다. 또 다른 인기 요소는 나체주의(FKK)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FKK는 첫 전성기를 맞았고, 공공장소에서의 나체 수영이 금지되자 곳곳에 클럽이 설립되었다.
"우리는 나체다, 당당하게!"
집단 아침 체조는 '융뫼을' 생활 개혁가들의 일과표 1순위였다. 정치적으로 이 클럽들은 극히 다양했다. 베를린의 아돌프 코흐와 추종자들은 사회민주당과 가까웠다. 이들의 모토: "우리는 나체다, 당당하게!" 부르주아 계급과 민족주의(뵐키셰) 계열의 나체주의 클럽도 존재했다. 하노버 니더작센 체육사 연구소장 베른트 베데마이어콜베는 "뵐키셰 진영은 실존하지도 않은 '게르만적 본성'으로의 회귀를 원했고, 부르주아 진영은 '성경적 본성', 즉 아담과 이브를 키워드로 삼았다"고 설명한다.
플라우어 호수 '융뫼을', 나체주의 낙원이 되다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시도: 1929년 메클렌부르크 플라우어 호수에서 생활 개혁가 요하네스 뮐러가 운영하는 사설 나체주의 시설 '융뫼을'에서 실현되었다. 바이에른에서의 첫 시도가 시기하는 이웃, 과잉 충성 경찰, 풍기 문란 혐의(곡물 수확 중 알몸 노출)로 실패한 뒤, 침례교 목사의 아들인 그는 메클렌부르크에서 재기를 꿈꿨다. 딸 레나테 아이히너(당시 89세)는 "아버지의 길이 친가에 대한 반항심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회고한다.
고기·커피 없는 금욕적 생활
요하네스 뮐러는 '융뫼을' 손님들에게 '자아로부터의 휴가'를 약속했다. 아침이면 종소리로 호숫가 체조를 알렸다. 아이히너는 "아버지가 탬버린을 치며 선두에 섰고, 체조 후 물에 들어갔다. 수건으로 닦는 건 금기였다. 뮐러의 방식은 '건조 체조'—몸이 마를 때까지 특정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숙소인 '빛과 공기의 오두막'은 갈대로 지어져 창문도 문도 없었다. 식사도 소박했다. 고기, 술, 커피는 금기. 과일과 채소는 자급자족했다. 증기선 '로렐라이' 관광은 인기 코스였다. 나체 승객을 태운 전세선이 메클렌부르크 호수 지대를 누비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더 많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뮐러는 나체주의 잡지에 광고를 냈다.
뤼네부르크 헤데 에게스토르프, 세계 최대 나체주의 출판사
이 잡지들을 주로 제작한 곳이 에게스토르프의 '로베르트 라우어르 출판사'다. 1924년 헤데 변방 마을에 자리 잡은 이 출판사는 순식간에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나체주의 전문 출판사로 성장했다. 독일-보헤미아 출신 로베르트 라우어르는 수많은 서적과 격주간지 '빛의 땅(Licht-Land)', 월간 화보 '웃는 삶(Lachendes Leben)'을 발행했다. '웃는 삶'만 해도 호당 4만 2천 부가 독일 전역에 팔려나갔다.
에게스토르프 마을 기록보관소장 마를리스 슈바니츠는 "정작 마을 자체에는 나체주의자들이 없었다"고 말한다. "라우어르는 최대 20명을 고용했다. 인쇄가 끝나면 역으로 실어 날라야 했는데 물량이 엄청났다. 우체국이 일요일에도 일하고, 열차에 화물칸을 추가로 연결해야 할 정도였다."
라우어르의 주제 세계: 종교, 성, 정치
라우어르 출판사의 잡지들은 종교, 성, 정치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다뤘다. '나체주의와 종교' 같은 성찰부터 세계 각국 소식, 클럽 소식, 성교육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로운 시대정신이 지면에 녹아 있었다. 베데마이어콜베는 "광고 구성, 사진 활용, 카누·니베아 크림 광고 등 놀랍도록 모던하다"고 평한다. 동시에 정치 담론도 치열했다. "민족주의 지면, 아돌프 코흐의 프롤레타리아 신체 문화, 매우 다채롭고 자유로운 토론이 오갔다."
도덕 감시자들의 코웃음과 압수 조치
자칭 도덕 수호자들은 에게스토르프 잡지를 탐탁지 않아했다. 개별 호가 연거푸 압수되고 광고 게재 금지와 발행 금지 처분이 쏟아졌다. 1926년 라우어르 출판사는 존폐 위기에 몰렸다. '웃는 삶' 8개 호가 금지·폐기 처분된 것. 뤼네부르크 법원에서 라우어르와 편집장 발터 브라운스는 '음란 문서 공동 발행' 혐의로 기소되어 각각 벌금 1,000마르크 또는 징역 50일형을 선고받았다.
나체 죄송 재판
두 사람은 판례를 남기기 위해 항소했다. '모든 나체 사진이 음란한가, 아닌가?' 사건이 뤼네부르크 지방법원에서 지법으로 이관되었고, 수백 장의 사진이 심의 대상이 되었다. 뮌헨 국립박물관 수석 큐레이터가 전문가 증인으로 소환되어 '예술인가, 폐기 대상인가'를 판단했다. 법정에서는 음모 길이, 여성 가슴의 그림자 등을 놓고 황당한 공방이 오갔다. 라우어르는 나중에 재판 기록을 책 '나체, 범죄가 되다(Nacktheit als Verbrechen)'로 출간했다. 재판 결과 두 사람은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글뤼징엔 '리히트슐하임': 나체주의 기숙학교의 파란
에게스토르프 인근 글뤼징엔에서는 개혁 교육가 발터 프렌첼이 1927년 나체주의 자녀를 위한 '빛의 학교 집(Lichtschulheim)'을 설립했다. 교육 당국의 승인 과정에서 할아버지(프렌첼)는 "나체 수업, 강요 없는 양육, 자유로운 사고"를 천명했고, 할머니가 발등을 밟으며 만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유주의적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특수 학교 설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5월 1일 개교, 1개 학급 6명으로 시작. 나체주의자 자녀들이 계절과 날씨 불문, 맨발로 들판과 숲을 누볐다. "보수적 농민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고, 그게 끝이었다"고 손자 하랄트 프렌첼은 회상한다.
북독일 나체주의 운동에 쏠린 세계의 관심
글뤼징엔 '리히트슐하임'은 현지인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30년 중국인 티모시 왕이 수일간 머물며 추운 11월 날씨에 맨발로 운동하는 아이들을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이듬해 상하이에서 출간한 '유럽의 새 길(New Paths in Europe)'에 글뤼징엔과 샤르보이츠 인근 클링베르크 야외 공원(푼니츠 호수 대형 나체주의 시설)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홀슈타인 클링베르크, 미국 나체주의자들의 성지가 되다
미국 기자 부부 프랜시스·메이슨 메릴도 클링베르크를 수주간 취재해 1931년 저서를 출간했다. 게르트루트 쿠머 연구자에 따르면 이 책이 영미권 나체주의자들의 방문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클링베르크 방명록에는 영국, 미국, 남미 방문객들의 장문 기록이 빼곡하다. 파울 치머만이 설립한 이 공원은 국제적 나체주의 핫스플로 부상했다. "도착하자마자 모든 걸 벗고 수영과 산책을 즐겼다. 스트레스 없는 휴가였다."
당시 미국은 훨씬 더 금욕적이었다. 메릴 부부의 책이 미국에서 출간될 때 도서관들은 나체 사진 페이지를 오려내야 했다. 1931년에도! 클링베르크가 그만큼 앞서 있었다는 방증이다.
1933년 나치, 자유로운 나체 문화 금지
나치 정권 장악과 함께 나체주의 운동에도 격변이 닥쳤다. 바이마르의 자유 다수가 박탈되고 클럽은 해산되거나 동화(Gleichschaltung)되었다. 1933년 봄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령 내 나체 목욕 금령을 내렸다. 에게스토르프 나체주의 시설과 글뤼징엔 '리히트슐하임'이 폐쇄되었다. 클링베르크도 압박을 받았다. 치머만은 '나치 신체 단련 연맹' 산하 편입을 거부했고, 유일한 합법 나체주의 협회 회원들의 클링베르크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외국인 발길도 끊겼다.
친유대주의 혐의: '융뫼을'의 종말
플라우어 호수 '융뫼을'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나체주의 생활을 유지했다. 프로이센과 달리 메클렌부르크에는 나치 집권 후에도 일반 나체 목욕 금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하네스 뮐러도 '신체 단련 연맹' 가입 압박을 견뎌야 했다. 1935년 여름까지 버텼다. 창립자의 딸 이르ム가르트 부흐홀츠(94세)는 "손님이 플라우 미용실에 다녀와 '내일 융뫼을 폐쇄한대'라고 전했다. 우린 이웃집으로 피신했다. 차량 세 대에서 많은 인원이 내려 첫 혐의로 '유대인 친화적'임을 들이댔다"고 증언한다.
실제 이 혐의로 '융뫼을'은 폐쇄됐다. 뮐러는 소송을 걸어 부분 승소했다. 나치 연맹에 복종하는 조건으로 재개장이 허가됐다. 늦어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융뫼을'의 자유로운 나체 생활은 막을 내렸다. 뮐러는 국방군에 징집되어 1945년 1월 동부 전선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더 이상 시설을 운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