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메클렌부르크에서는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고향을 잃었습니다. 독일 내부 국경에 제한 구역이 설정되는 과정에서 슈타지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규정했고, 코드명 "운게치퍼(Ungeziefer, 해충)"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글: 페트라 하이센
마리루이제 뷔세(Marie-Luise Busse)는 70년 전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시 그녀는 엘베 강 제방 바로 뒤에 자리한 마을 보크페이(Vockfey)에서 어머니와 두 자매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실종 처리되었기에, 어머니는 혼자서 말, 돼지, 소, 닭과 50헥타르의 농지를 꾸려가며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이 '무인의 땅'이 되다
철조망이 둘러쳐졌습니다. 내독 국경의 주민들은 어느 날부터 제한 구역 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마리루이제는 인생의 첫 12년을 엘베 제방에서 보냈습니다. 학교에 다니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소녀에게도, 1952년 부모님 집 부엌 창문 앞에 철조망 울타리가 갑자기 세워지기 전까지는 안전감이 있었습니다. 같은 해 5월 26일, 동독 각료 회의는 동독과 "서독 점령 지역" 사이 분계선 조치에 관한 조례를 통과시킵니다. 서쪽 국경은 '봉쇄'될 예정이었고, 그를 위해 국경을 따라 폭 5km의 출입 금지 구역, 폭 550m의 보호 구역, 폭 10m의 통제 구역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마리루이제의 가족은 동독의 "무인의 땅"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방문은 허가가 필요했고, 밤에는 통행 금지가 시행되었습니다.
부세 가족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8시간
12살 마리루이제와 가족에게 보크페이의 농장을 떠날 시간은 이틀뿐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마리루이제는 시장의 딸에게 "마을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얘기를 들었니?"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소녀는 최대한 빨리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언니의 기억에 따르면 마당에 선 자매들은 서럽게 울었고,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누비며 누가 떠나야 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가족이 48시간 안에 마당을 비워야 한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났습니다. 단 하루 만에 보크페이의 농부 53명이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 대상이 되었습니다. 짐은 화물 열차 반 칸에 담을 수 있는 만큼만 허용되었습니다.
"해충" —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글자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여정: 보크페이에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웃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입니다. 짐 실은 마차는 브랄스도르프(Brahlsdorf) 역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은 낡은 철도 객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인민 경찰 장교들은 그것이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마리루이제는 회상합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시 시베리아가 아닐까, 두려움이 감돌았습니다. 기차는 멈춰 섰다 다시 달리기를 반복하며 밤늦게까지 운행했습니다. 마리루이제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화물열차 차체에 새겨진 "해충"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글자는 소녀의 머릿속에 불처럼 새겨졌습니다. 자신들이 그런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강제 정착지 말힌에 도착하다
마리루이제의 가족이 탄 기차는 말힌(Malchin)에 멈춰 섰습니다. 트럭이 이주민들을 인근 마을로 나누어 실어갔고, 가족은 한 농장의 방 하나를 배정받았습니다. 테이블과 의자가 겨우 들어가는 16제곱미터 규모의 방에는 침대를 놓을 자리조차 없어 바닥에서 잤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분명 잘못을 저질러 쫓겨난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마리루이제 뷔세는 "딱히 반갑게 맞이받지는 못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집세를 내기 위해 자매들은 매일 사탕무를 깎고 젖짜기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
고발이 이주 대상을 가렸는가?
보크페이에서는 무려 53명의 농부가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국경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숫자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마리루이제 뷔세는 고향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떠나야 했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의 기준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개인적인 고발도 한몫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리루이제는 새 파트너를 만난 미혼모가 누군가의 협박을 받았다고 의심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사라진 어린 시절의 풍경
"해충"이라는 단어는 마리루이제 뷔세 같은 추방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았습니다.
제방 위에 서 있던 그들의 집을 포함해 버려진 가옥들은 점차 철거되거나 폭파되었습니다. 1973년에는 잔해가 16미터 깊이의 물웅덩이 아래로 파묻혔고, 그 모습은 동독이 소멸한 지 한참 뒤에야 다시 드러났습니다. 마리루이제의 어린 시절의 장소는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철거된 집에서 거둔 돌들을 모아 마을에는 지금 "생각의 피라미드"라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루이제는 수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마쳤고, 남편과 함께 세 자녀를 키웠으며 지금은 노이브란덴부르크에 살고 있습니다. 여동생 역시 자신만의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어머니는 훗날 다르군(Dargun) 근처에 정착지를 물려받았지만, 보크페이의 농장을 잃은 아픔은 끝내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통일 이후, 5년의 투쟁 끝에 되찾은 땅
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이루어지자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은 시위를 벌였습니다. 마리루이제 뷔세와 어머니도 그 행진에 동참했습니다. 5년간의 투쟁 끝에 가족은 마침내 땅을 되찾았습니다. 그 후로 가족은 매년 정기적으로 고향을 찾았습니다. 마리루이제와 남편은 농장이 있던 초원에 캐러밴을 세웠고, 어머니도 200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종종 함께했습니다. 이제 그 땅은 마리루이제의 자녀들에게 물려졌습니다. 앞으로 그곳을 어떻게 가꿀지는 다음 세대가 결정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