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나치의 약탈: 유대인 이민자들의 재산을 어떻게 강탈했나

나치 정권을 피해 도망친 유대인들은 고국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소지품이 함부르크 등지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나치는 이를 통해 수백만 마르크를 챙겼고, 피해자와 그 후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다.

글: 조피아 민더-퓌링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들이 카트린 클라입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독일 역사의 한 장, 즉 오늘날까지 그 전리품이 행방불명된 나치의 거대한 습격 사건을 직면하게 하고 있다. 유대인 피해자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소지품을 찾고 있다. 브레머하펜 독일해양박물관의 고고학자이자 출처 연구자인 클라입은 이제 이 약탈품을 다시 찾아내려 한다.

"가장 큰 동기는 피해를 입은 가족들에게 물건을 돌려줄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피해 가족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뿌리와 실질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 않은 경우를 계속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죠."라고 그녀는 NDR 다큐멘터리 "약탈 미술품 퍼즐 - 정의를 위한 추적"에서 말한다. 일반적으로 피해자들은 끔찍한 사건을 다시 떠올리지 않기 위해 과거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사 화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재구성함으로써, 이 가족들이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라이히 도피세와 강제 부과금, 출국을 어렵게 만들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탄압으로 독일 제국 전역의 유대인들이 이민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이민에는 높은 수수료가 따랐다: "세금, 강제 부과금, 유대인 재산세, 라이히 도피세 등을 동원해 소유자들을 완전히 재정적으로 탈탈 털어버리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라고 역사가 프랑크 바요어는 나치의 전술을 설명한다.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짐을 싸서 이민을 갈 수 있었다.

유대인의 이사 화물, 압수되어 경매에 부쳐지다

단넨베르크의 볼프 가족은 우루과이로 이민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이사 화물은 이 리프트 밴에 실려 함부르크에서 선적되었고, 실제로 목적지에 도착했음이 확인되었다.

컨테이너 크기의 소위 '리프트 밴'에 포장된 소지품들은 운송업체들을 통해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환적 지점을 거쳐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수천 개의 이사 상자는 원래 주인에게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자 화물선들이 더 이상 항구를 떠나지 못했다. 상자들이 항구에 쌓여갔고, 게슈타포가 이를 압수했다. 1940년 4월부터 1942년 말까지 이사 화물들이 경매에 부쳐졌다. "매일 무언가가 진행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클라입은 말한다.

'유대인 상자'에서 '집행관 사무실'로

함부르크의 '집행관 사무실' 경매장: 현재는 법무 및 소비자보호청이 자리하고 있다.

함부르크에서는 '유대인 상자'에서 나온 물건들이 '집행관 사무실'과 21개의 경매장에서 가구별로 경매에 부쳐졌다. 신문 광고가 경매를 홍보했다. 은수저부터 속옷까지 모든 것이 팔려나갔고, 사람들은 헐값에 물건을 사려 몰려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정상적인 시장 가격이 지불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의도된 바도 아니었죠. 일종의 사회정책적 조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바요어는 설명한다.

게슈타포, 미술품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챙기려 하다

물건들은 '착취'당했고, 수익은 독일 제국 국고로 귀속되어야 했다고 클라입은 말한다. "특별한 미술품이 있으면 리프트 밴에서 따로 꺼내 별도 경매에 부쳤습니다. 최대한의 이익을 내기 위해서였죠." 함부르크에서는 카를 F. 슐로이터 경매장이 이런 미술품 경매를 전문으로 했다.

에밀 놀데의 '양귀비꽃'은 어디에 있는가?

분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의 도움을 받아 코흐 가문의 후손들은 에밀 놀데의 회화 '양귀비꽃(Klatschrosen / Klatschmohn)' 등을 찾고 있다.

비스바덴의 로테와 게오르크 코흐 부부의 미술 컬렉션도 그중 하나였다. 로테 코흐는 런던으로 이민했지만, 이사 화물은 함부르크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후손들은 이제 역사연구소 팩츠 앤드 파일즈(Facts & Files)의 도움을 받아 놀데, 야울렌스키, 클레의 작품들을 찾고 있다. 놀데의 '양귀비꽃'의 행방은 일부 힘들게 재구성할 수 있었다. 클라입은 이 작품이 막스 노트나겔 경매사에 의해 경매되었음을 밝혀냈다. 북독일의 한 소상인이 낙찰받았고, 이후 엘름스호른의 은행 금고로 들어갔다가 킬의 네겔린 화랑이 매입해 놀데 재단으로부터 진품 확인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한 화랑을 통해 프랑스로 팔린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미술품 거래상은 정보 제공 의무가 없다. 바요어는 오랜 세월과 잦은 소유권 이전이 조사를 어렵게 만들고, 진실을 은폐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불두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다

클라입의 연구 덕분에 이 대리석 불두상이 이제 상속인들에게 반환될 수 있게 되었다.

베를린의 미술품 수집가 요하나 플로시츠키의 상속인들도 분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 등을 통해 피사로, 리버만, 베크만 등의 작품이 포함된 소장품을 찾고 있다. 그녀의 소장품 약 1,500점이 3일간의 경매에서 팔려나갔다. 카트린 클라입은 플로시츠키가 파리에서 구입했던 대리석 불두상의 행방을 찾아냈다. 이 작품은 약 80년간 로텐바움 박물관(MARKK)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제 상속인들에게 반환될 예정이다. MARKK와의 첫 번째 큰 공동 연구 성과다.

가구 경매에 나치 관료 기구 전체가 동원되다

역사가 프랑크 바요어에 따르면, 경매에 대해 아무도 도덕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시스템의 높은 분업화 때문이기도 하다.

함부르크에서만 1940년대 초반 약 3,000가구, 브레멘에서 약 1,000가구의 가재도구와 귀중 미술품이 경매에 부쳐졌다. 수백만 개의 물건이 망치 아래 놓였다. 유대인 이민자들은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제노바, 트리에스테, 나폴리, 마르세유,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항구를 통해서도 이사 화물을 보냈는데, 이것들도 결국 경매에 부쳐졌다. 나치 독일의 국가 기구 전체가 이를 위해 가동되었다고 바요어는 말한다: 게슈타포, 은행, 운송업체, 보관회사, 행정 직원, 세무 공무원 등 수많은 크고 작은 집단들이 관여했다. "협업과 분업에 크게 기반한 전반적인 시스템이며, 모든 사람이 이에 따라 참여했습니다."

이 관료적 메커니즘은 애초에 양심의 가책이 생기지 않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저는 오직 작은 영역만 책임지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맡습니다."라고 바요어는 이 전략을 설명한다. "개인의 행동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아 보이지만, 이러한 개별 행동들의 총합이 완전히 '완벽한' 밀폐된 시스템을 형성합니다."

폭격 피해자와 다자녀 가구에 우선 구매권 부여

'피해 입은 동포에게 우선권': 1941년 3월 29일자 '함부르거 안차이거' 신문 광고처럼 경매를 홍보했다.

폭격 피해자, 다자녀 가구, 박물관 등에 우선 구매권이 주어졌다. "미리 물건을 살펴보고 가장 좋은 것을 선점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클라입은 말한다. 독일 전역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사회행정청 같은 공공기관도 구매에 나섰다. 바요어에 따르면 "참여하지 않은 인구 계층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자발적' 경매: 나치 법으로 강탈을 합법화하다

현재 함부르크 미술관, MARKK, 알토나 박물관, 함부르크 역사박물관, 공예미술관 등이 이사 화물 경매에서 작품을 구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각 경매 전에 집행관은 '자발적' 경매라고 발표했다. 소위 제11조 명령에 따르면, 출국한 사람은 더 이상 소지품의 소유자가 아니며, 그 물품은 자동으로 '자발적으로' 경매에 부쳐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결코 자발적이지 않았죠."라고 클라입은 말한다. "당연히 소유자들은 자신의 이사 상자를 돌려받고 싶어 했습니다." 바요어는 이를 '말장난(verbal cosmetics)'이라 부르며, 구매자들의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지적한다.

경매로 나치 금고에 수백만 마르크가 들어가다

유대인 가족들의 가재도구는 보통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낙찰되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몰림도 컸다. 이는 뢰라흐의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요어에 따르면 대도시의 익명성이 경매 사업을 특히 쉽게 만들었다. "구매자들은 당연히 자신이 산 물건들을 특정 이전 소유자와 연결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매장에서 군중 속에 섞여 있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행동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었다. 함부르크 경매 사진은 남아있지 않지만,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소도시 뢰라흐 경매 기록에는 사람들이 입찰하려고 몰려드는 모습이 담겨 있다. 대중에게는 저렴한 '쇼핑의 즐거움', 나치에게는 좋은 장사였다. 함부르크 경매만으로 게슈타포가 도이체방크 계좌에 720만 라이히스마르크를 입금했다. 각종 동결 계좌를 고려하면 총수입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퍼즐 맞추기로 물건과 후손을 잇다

이 경매 장부 등은 요하나 플로시츠키의 가재도구 구매자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독일 분실문화재재단이 지원하는 LIFTProv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카트린 클라입은 이제 누가 물건을 샀는지 밝혀내어 정당한 소유자에게 돌려주려 한다. 재고 목록, 송장, 경매 장부 등을 통해 물건의 경로와 누가 언제 무엇을 샀는지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소유자에 대한 단서는 피해자들이 2차대전 후 소지품 반환을 요구한 배상 소송 서류에서만 얻을 수 있다. 클라입은 이들의 진술과 서류를 대조한다. 그녀는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기록해 2022년 말 공개할 예정으로, 구매자와 피해자가 이를 검색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는 퍼즐 맞추기와 같다. "이것도 과거 청산의 일환으로 봅니다." 각각의 개별 사례를 통해 그녀와 동료들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독일 역사의 한 부분을 다루고, 재구성을 통해 '어쩌면 다시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 연구란 무엇인가?

출처 연구자들은 미술품의 출처를 조사한다. 1998년 워싱턴 선언으로 독일은 자국 박물관이 나치에 의해 압수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규명할 것을 약속했다. 만약 그렇다면, 박물관은 원래 소유자의 상속인에게 알려야 한다.

배상,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싸움

보상청에서 역사가 위르겐 릴타이허는 1960년대 소송 서류들을 다수 검토했다. 피해자들이 손실을 입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후 피해자들은 긴 배상 소송을 벌였다. 1960년대 역사가 위르겐 릴타이허는 보상청에서 수많은 서류를 검토하며 젊은 연방공화국이 나치 과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목격했다: "마치 사회에 바늘을 꽂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회상한다. "이전 박해 피해자들이 재산을 되찾는 것뿐만 아니라, 독일 법원이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부당함이 저질러졌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종종 일어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무엇이 도난당했는지 입증하기는 어려웠다. 물건 사진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민 전 많은 이들이 관세 절감을 위해 실제보다 낮은 가치로 소지품을 신고했다. 이제 감정인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슐로이터 같은 경매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양심의 가책 없는 구매자들

경매 기록에서 확인된 구매자들은 약탈품을 샀다는 데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고 클라입은 말한다. 오히려 그들은 서류를 의심했다: 그 서류들로부터 자신이 실제로 경매장에 있었고 구매했다는 것을 어떻게 결론 내릴 수 있느냐고. 그들 역시 더 이상 서류가 없거나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고 주장했다. "제가 지금 구매자 이름이 적힌 경매 명단을 찾는다면," 클라입은 말한다, "정보가 꽤 명백합니다. 하지만 전후 시기에 사람들은 이 구매자들을 추적하는 것을 귀찮아했습니다."

국가, 개인의 죄책을 돈으로 해결하다

결국 연방공화국이 채무자로 나서 법원을 구제했다. "개인들의 개인적 죄책이 국가에 의해 면제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라고 릴타이허는 말한다. "전후 시기를 관통하는 논리: 나치 국가가 개인의 행동에 책임이 있지, 개인이 책임이 아니라는 것." 그건 정치적으로 의도된 것이었다고 바요어는 말한다. 논쟁이 일지 않게 하려고. "이제 나치 시스템을 따랐던 인구로 민주주의를 건설해야 합니다. 제가 끊임없이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게 가능할까요?"

많은 배상 절차가 수십 년 만에 합의로 끝났다. "그저 이 모든 일을 끝내버리고 싶었던 인상을 받습니다."라고 릴타이허는 말한다. "그리고 나서 실제 이사 화물 가치에 훨씬 못 미치는 합의금으로 퉁쳤습니다."

미술품과 가구, 여전히 독일 가정에

나치 경매에서 구입된 수많은 가구와 미술품이 여전히 개인 가정에 있을 것이다. 개인들에게도 접근해야 한다고 바요어는 말한다: "국가가 해당 금액을 지불하고 구매자들을 면책해주는 것으로 과정이 마무리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출처 연구자 클라입은 이제 손자 세대가 움직이고 있다고 본다: "이제 그들이 부모와 조부모에게 물어볼 차례입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이 가구 뒤에 숨은 이야기를 말해줘." 답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로 인해 빛이 비출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