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은 1214년 스코틀랜드 국왕 ‘사자왕’ 윌리엄(William the Lion)이 서거한 날입니다. 이 군주는 전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였고, 그 결과는 연합 왕국(UK) 잔류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또한 두 나라 갈등의 가장 유명한 순간 중 하나—영화 『브레브하트』 덕분에 널리 알려진—는 1286년 알렉산더 3세 국왕 사후 새 스코틀랜드 국왕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벌어졌습니다.
새 국왕 선출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중재했는데, 그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사자왕 윌리엄의 이름이 여러 차례 거론되었습니다. 그가 소환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왕위의 주요 후보들이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로 이 글의 핵심인데, 그의 긴 통치 기간(1165~1214) 동안 두 왕국 사이의 봉신 관계가 여러 차례 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1174년, 반란의 봄
시선을 1174년 봄으로 옮겨 보겠습니다. 헨리 2세는 아들들인 어린 헨리(Henry the Younger), 리처드, 조프리가 주도하고 아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그녀의 전남편인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배후에 있는 대규모 반란에 시달리다가,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잉글랜드 정세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져 있었는데, 우리 주인공인 스코틀랜드 국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해 노샘프턴, 노팅엄, 레스터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헨리가 잉글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취한 첫 행동은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이 토머스 베켓 살해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는 여론을 의식한 그는 캔터베리로 곧장 향했습니다. 다른 순례자들처럼 순교자의 무덤 앞에 무릎 꿇은 그는 오랜 눈물의 기도 끝에 대주교의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결백을 호소하면서도, 자신이 흘린 말이 살인을 불러왔으니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이후 3일간 금식하며 속죄했고, 마침내 수도원 수사들에게 회초리를 맞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수많은 목격자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베켓과의 빚을 갚았으며 성인이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행동은 효과를 거둔 듯합니다. 그가 아직 캔터베리에 머무는 동안, 잉글랜드군이 알닉(Alnwick)에서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국왕을 격파하고 국왕 본인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 내 반란에 가담했던 나머지 귀족들은 패배하거나 항복했고, 헨리는 8월에 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신속한 귀환은 프랑스의 루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어린 헨리를 기습처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은 잉글랜드 국왕이 돌아오기 전에 수도 루앙을 함락할 작정으로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계획이 실패하자 포위를 풀었고 루이는 강화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팔레즈 조약: 굴욕의 봉신 서약
강화 회담은 몽루이(Montlouis)에서 열렸습니다. 강력한 적들의 동맹을 상대로 자신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한 헨리 2세는 반역한 아들들에게는 관대함을 베풀 여유가 있었지만, 스코틀랜드 군주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헨리는 윌리엄에게 1174년 12월 팔레즈 조약(Treaty of Falaise)에 서명하도록 강요했고, 그 결과 여러 성이 몰수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국왕과 귀족들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스코틀랜드 왕국이 잉글랜드의 봉신국임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훗날 석방된 윌리엄은 자신이 강압에 못 이겨 맹세한 것이라며 서약을 파기했습니다.

사자심장 리처드, 스코틀랜드를 팔다
몇 년 후, 이 문제는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인 사자심장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 앞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리처드는 브리튼 제도 최대의 섬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성지 정복의 야망과 대륙에서 프랑스의 필리프와의 대결에 더 마음을 쏟았습니다. 재위 10년 중 단 6개월만 잉글랜드에 머문 그는 잉글랜드를 십자군 원정 자금을 뽑아내는 수입원으로만 여겼습니다. 한 연대기 작가는 그의 입을 빌려 “구매자만 나타난다면 런던이라도 팔 것이다”라는 말을 전합니다.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는 사자심장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는 대목입니다. 잉글랜드에 대해 저런 생각이라면 스코틀랜드의 운명은 더더욱 신경 쓸 리 없었습니다. 다시금 자금 조달을 행동의 출발점으로 삼은 그는 사자왕 윌리엄과 접촉해, 아버지에게 억지로 바치게 했던 공물 관계를 철폐하는 대신 십자군 원정 자금으로 쓸 상당한 금액을 받아내는 합의를 맺었습니다.

무지왕 존과 노럼 조약
이 문제는 그와 함께했던 세 번째 잉글랜드 국왕인 무지왕 존(John Lackland) 대에 다시 불거졌습니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가 손잡고 잉글랜드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존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존은 자신에게 반역하고 조카 브르타뉴의 아서 살해 혐의를 씌운 드 브로즈(de Braose) 가문 추적을 구실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사자왕 윌리엄에게 노럼 조약(Treaty of Norham)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로써 윌리엄은 다시 한번 잉글랜드 국왕을 스코틀랜드의 봉건 영주로 인정해야 했고, 프랑스와의 연합 침공 위협은 종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로, 더 이상 사자왕 윌리엄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후의 전개는 스털링 다리 전투, 팔커크 전투, 그리고 로버트 브루스와 존 코민 사이의 갈등을 다룬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