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언제나 취향의 문제다. 어떤 이에게 위대한 걸작이 다른 이에게는 취한 바보의 휘갈긴 낙서로 보이곤 한다. 거리 예술과 그래피티의 세계에서는 이 간극이 특히 두드러진다. 노련한 거리 예술가일수록, 정성껏 완성한 작품 위에 누군가 스프레이로 이름만 덧칠하고 떠나는 '저급한 태깅'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태깅에도 자랑스러운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 소개하는 인물은 역사상 최초의 태거이자 비더마이어 시대의 그래피티 마스터, 조셉 키셀락(Joseph Kyselak)이다.
Joseph Kyselak: 타고난 패배자?
조셉 키셀락은 과연 누구였으며, 그래피티와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기록은 많지 않다. 그는 아마도 18세기 말 빈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출생 연도마저 불확실하지만, 평온한 유년기를 보내기에는 결코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기 10년 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이내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휘말렸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조적인 장면이다.
어린 키셀락의 처지도 그리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공무원 가문의 아들이었다(당시 모든 오스트리아인의 최종 목표라 할 수 있는 신분!). 아버지는 'k.k. 개인·가족·필수 기금 최고 관리관'이라는 직함으로 빈의 권력자였는데, 이 직함은 역사상 가장 길고 쓸모없는 직함 후보로 손꼽힌다. 나폴레옹에 대한 승리와 빈 회의가 막을 내린 직후, 키셀락은 Matura(오스트리아 고등학교 졸업시험)를 통과하며 학업을 마쳤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무원이 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시대의 흐름도 그를 도왔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비더마이어(Biedermeier)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가보다 조용히, 주목받지 않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 — 공무원에게 딱 맞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젊은 키셀락은 공무원의 삶을 포기하고 빈 대학교 철학과에 등록했다. 물론 그 시절 철학 공부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취업을 미루는 핑계'에 가까웠다. 몇 학기를 보내다 실패하자 결국 중퇴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부서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바로 무급 인턴 자리였다! 오늘날 철학 전공 학생들이 잘 알다시피, 악명 높은 선례다.
빈의 펍 크롤링이 가져온 변화
Vitalfondskassenoberdingsbums에서의 키셀락 인턴 생활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곳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7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인턴 신분이었다. 그 사이 조수 자리에 지원했지만 거절당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절 사유는 다른 지원자들에게 더 이상 무급 인턴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사람은 바로 요셉 자신이었으리라. 시간은 1825년. 서른 줄에 접어드는 키셀락은 인생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학위는 낙제, 아버지 직장에서 7년째 무급 인턴. 필연적으로, 그는 술을 즐겼다.
빈 슈피텔베르크(Spittelberg)의 어느 저녁, 동료들과 사교적으로 잔을 기울이던 밤에 그의 인생을 바꿀 순간이 찾아왔다. 취중에 친구들과 내기를 건 것이다. 키셀락은 3년 안에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유명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 범죄를 저지르거나 새로운 자살 방법을 고안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절망의 산물, 낙서의 아버지로
새로운 자살 방법을 고안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테지만, 틀림없는 빈 토박이였던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같은 해 그는 오스트리아 전역을 가로지르는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동기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모험을 책으로 엮는 것. 비더마이어 시대에 여행기는 크게 유행했고, 빠르게 명성을 얻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키셀락은 학생 때나 인턴 시절만큼 작가로서도 재능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도보 여행 스케치…』라는 그의 책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B계획이 있었다. 여행 내내 잉크와 붓을 휴대하며, 가는 곳곳의 눈에 띄는 자리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3년간 전국을 누볐다. 니더외스터라이히,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잘츠부르크, 바이에른, 티롤까지… 벽과 이곳저곳에 굵은 검은 글씨로 자신의 상표를 남겼다. 불과 1년 만에 빈의 술친구들은 그가 내기에서 이겼음을 인정해야 했다. 신비로운 'Kyselak' 글씨에 대한 소문은 전국으로 퍼졌고, 바하우(Wachau)에서 티롤의 고산 지대까지 그의 태그가 목격되었으며 언론은 그 배경을 궁금해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현대 그래피티가 등장하기 무려 150년 전의 일이다!
역사상 최초의 그래피티 대가, Kyselak의 유산은?
하지만 키셀락은 새로 얻은 명성과 내기 승리에 크게 만족하지 않았던 듯싶다. 1828년 파사우에서 빈으로 돌아왔고, 불과 3년 뒤 서른 살을 조금 넘긴 나이에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도시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씻지 않은 과일을 먹음으로써 스스로 병에 걸렸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는 결국 '새로운 자살 방법'을 고안해 낸 셈이다!
키셀락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확인할 수 있다. 바하우의 암석 표면에는 여전히 그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세기 빈에 이미 최초의 모방자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오늘날 빈 곳곳의 건물에서도 'Kyselak'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피티 마스터 조셉 키셀락을 둘러싼 전설도 전해진다. 그중 하나에 따르면, 그는 프란츠 1세 황제에게 소환되어 끝내 저속한 낙서를 그만두라고 명령받았다. 키셀락은 즉시 개선을 맹세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황제는 자신의 집필책상에 새겨진 'Kyselak'이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전설이든 아니든, 비타협적인 태도와 스텐실까지 활용해 도처에 똑같은 글자를 남기던 그의 기행은, 키셀락을 그래피티 역사상 최초의 태거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앞서 말했듯, 이는 오늘날 거리 예술계가 여전히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키셀락은 분명 내기에서 승리했다. 수천 명의 태거들이 그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키셀락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고, 무엇을 배우지 말아야 하는지는 이 게시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주장되는 '역사의 반복'에 대해 다룬 글이다. 다행히 오늘날 빈의 거리 예술 씬은 값싼 태그 그 이상을 제공한다. 필자의 오랜 친구 Thomas가 최근 『Street Art Guide Vienna』를 출간했으니 강력 추천한다. 공공장소의 예술 작품은 Vienna Murals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수시로 만나볼 수 있다. 다음에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