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72년 함부르크 RAF 테러, 특수수사팀장의 비극적 최후

지금 돌아보면 무모한 작전으로 보이는 사건이 있다. 1972년 3월 2일, 함부르크 경찰은 이른바 '바더마인호프 갱'으로 불리던 테러 조직 RAF(적군파)의 멤버들을 검거하기 위해 특별수사본부(Soko)를 꾸려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 실마리가 수사관들을 로터바움 지역으로 이끌었다. 대학 근처의 고급 주택가로, 빌헬름 시대 양식의 저택들이 늘어선 동네였다. 하임후더 거리 82번지에 의심스러운 아파트가 있다는 정보였다. 그리고 그 작전을 직접 지휘한 것은 특별수사본부의 책임자인 형사감 한스 에크하르트(Hans Eckhardt) 본인이었다.

계단참에서 벌어진 밤의 총격전

수사관들은 아파트에 진입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몇 명의 경관들은 닫힌 현관문 뒤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밤 10시 45분경, 폭스바겐 버스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섰고, 두 명의 남자가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두 번째 층의 아파트 문을 열던 순간, 그들은 권총을 뽑아 든 경찰과 마주쳤다. 한 명이 "손 들어라, 경찰이다!"라고 외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즉시 자신의 총을 잡아 총구를 겨눴다. 탄환은 에크하르트 형사감의 가슴과 배를 관통했고,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경찰들이 즉각 응사하여 총격벽을 피격했다. 총격벽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부상으로 계단참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한 명은 저항 없이 체포되었다.

함부르크 경찰이 마주친 RAF의 핵심부

구급대원들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 남자들은 누구인가? 곧 총을 든 사람이 만프레드 그라쇼프(Manfred Grashof)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25세였던 그는 RAF의 핵심 인물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1년 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도주한 전력이 있으며, 테러 조직 내에서는 '카를로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위조 신분증 전문가로 통했다. 실제로 수사관들은 함부르크 건물 안에서 완비된 위조 공작소를 발견했다.

RAF란 무엇인가?

RAF(적군파)는 1970년 봄 안드레아스 바더, 울리케 마인호프, 구트룬 엔슬린이 창설한 테러 조직으로, 일부 언론에서는 처음에 '바더마인호프 갱'이라 불렀다. RAF의 뿌리는 1960년대 말 학생 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정확한 연관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다. 이들의 자기 규정에서 핵심 개념은 라틴아메리카 혁명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도시 게릴라'였다. 목표는 소수 정예가 폭력을 포함한 수단으로 정치 체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RAF는 일련의 강도 사건에 이어 1972년 5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미 육군 본부를 향해 첫 폭탄 테러를 감행했고, 직후 함부르크의 악셀 슈프링거 출판사 건물 등을 대상으로 추가 공격을 이어갔다. 몇 달 안에 수사당국은 RAF 멤버 대부분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라쇼프의 동행자도 경찰에게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볼프강 그룬트만(Wolfgang Grundmann). 마르부르크 출신의 23세 학생으로, 카이저슬라우테른 은행 강도 사건과 연루되어 수배 중이었다. 이 사건에서 경관 한 명이 총에 맞았고 약 13만 마르크가 강탈되었다.

구원하지 못한 생명, 그리고 거대한 배웅

경찰들이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에펜도르프 대학병원의 의사들은 총상을 입은 경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중상을 입었음에도 며칠 후에는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하임후더 거리 총격전 이후 정확히 20일째 되는 날, 한스 에크하르트 형사감은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충격에 빠진 시민 약 3,000명이 3월 28일 알스터도르프 체육관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그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었다. 올스도르프 묘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을 위해 여러 도로가 통제되었다.

에크하르트는 함부르크에서 RAF가 낸 두 번째 희생자였다. 이미 6개월 전인 1971년 10월 22일, 한 형사가 체포 작전 실패 중 쇼핑센터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진 바 있었다.

테러범들에게 내려진 형량

1977년 카이저슬라우테른 법원은 살인 혐의로 만프레드 그라쇼프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89년 3월 2일, 함부르크 총격전 17주기를 맞은 바로 그날, 그는 석방되었다. 당시 라인란트팔츠 주지사였던 베른하르트 포겔(기민련)이 특사한 것이다. 볼프강 그룬트만은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4년형을 복역했다.

수사당국은 이번 검거로 RAF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수배 목록에는 여전히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를 포함한 수많은 용의자가 남아 있었다. 이들은 독일 전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폭탄 테러와 강도 사건 이후 몇 달 뒤에야 체포되었다. 그러나 적군파의 테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1977년 '독일의 가을'에 절정에 달했다. 고용주 연합회장 한스 마틴 슐레이어의 납치와 살해, 그리고 모가디슈로 향한 루프트한자 '란츠후트'기 납치 사건이 그것이다. RAF 세 세대가 저지른 범죄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