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폭탄과 죽음의 30년: 독일 적군파(RAF) 테러 조직의 흥망성쇠

폭탄과 죽음의 30년: 독일 적군파(RAF) 테러 조직의 흥망성쇠

적군파(Rote Armee Fraktion, RAF)는 1960년대 후반 서독 학생운동의 여파 속에서 태어나 연방공화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좌익 테러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약 30년간 이어진 폭력의 종막은 1998년 해체 선언이었지만, 지금도 수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적군파(RAF)는 1970년 봄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 울리케 마인호프(Ulrike Meinhof), 구드룬 엔슬린(Gudrun Ensslin)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초기 언론은 이들을 '바더-마인호프 갱'이라 불렀습니다. RAF의 뿌리는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정확한 연관성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조직명에는 도발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들이 스스로를 소련군의 분파로 인식했는지 여부는 아직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이름이 힘과 혁명적 잠재력을 상징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RAF는 '도시 게릴라'를 자기 이미지의 핵심 개념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혁명 세력과 유사한 발상으로, 소규모 집단이 폭력을 통해 정치 체제를 전복시키겠다는 것이 공통 목표였습니다.

첫 번째 은행 강도와 폭탄 테러

RAF가 목표 달성을 위해 희생자를 감수했다는 사실은 금세 드러났습니다. 첫 번째 희생자는 1971년 함부르크의 형사수사관 노르베르트 슈미트(Norbert Schmid)였고, 뒤이어 카이저슬라우테른의 경찰관, 1972년 3월에는 함부르크 경찰 특별수사본부장 한스 에크하르트(Hans Eckhardt)가 숨졌습니다. 연이은 은행 강도 사건 이후 RAF는 1972년 5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미 육군 본부에서 첫 폭탄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직후 함부르크의 악셀 슈프링거(Axel Springer) 출판사 건물과 하이델베르크 주둔 미군 유럽 본부 건물 등에 대한 추가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색 작전에 착수했고, 몇 달 만에 바더, 마인호프, 엔슬린 등 핵심 멤버 대부분을 체포합니다.

슈타메하임 재판: 법정에 선 테러리스트들

1975년, 재판은 슈투트가르트-슈타메하임에 특별히 건설된 고보안 법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훗날 연방내무장관이 되는 오토 실리(Otto Schily)가 피고 측 변호인으로 참여했는데, 그는 법정에서 "이 재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모든 법적 보장이 체계적으로 파괴된 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협박당한 증인, 피고인과 변호인 간 대화 감청, 피고인들의 단식 투쟁 등 절차 전반이 처음부터 심각하게 방해받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습니다.

'독일의 가을'과 RAF의 납치 테러

재판은 폭력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RAF '2세대'는 점점 더 잔혹한 공격에 나서 연방검찰총장 지그프리트 뷔백(Siegfried Buback)과 은행가 위르겐 폰토(Jürgen Ponto) 등을 살해했습니다. 테러는 1977년 9월 5일 고용주연합회장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Hanns Martin Schleyer)의 납치로 시작된 이른바 '독일의 가을' 동안 정점에 달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수주 동안 온 나라를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10월 13일에는 테러 특공대가 루프트한자 여객기 '란츠후트(Landshut)'편을 모가디슈로 납치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를 통해 슈타메하임에 수감된 동지들을 석방하려 했으나, 헬무트 슈미트(SPD) 총리가 이끄는 연방정부는 굴복하지 않았고 10월 18일 특수부대 GSG 9의 진압 작전으로 인질 82명 전원이 무사히 구조됩니다.

그로부터 단 하루 만에, 납치됐던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가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그는 RAF가 목숨을 앗아간 34명 중 한 명입니다. 한편 철저한 보안 속의 슈타메하임 교도소에서는 안드레아스 바더, 구드룬 엔슬린, 얀카를 라스페가 석방 계획 실패를 알게 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감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의 사망 경위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으며, 가혹한 수감 환경의 영향도 함께 거론되고 있습니다.


멈추지 않는 살인

'3세대'는 1980년대 초 전략을 바꿔 RAF의 국제화를 추진했지만, 살인은 계속되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희생자는 도이체방크 이사회 대변인 알프레트 헤르하우젠(Alfred Herrhausen, 1989)과 트로이한트 관리국 회장 카르스텐 로베더(Karsten Rohwedder, 1991)이며, 로베더는 RAF의 마지막 살인 희생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2년 클라우스 킨켈(Klaus Kinkel) 법무장관(FDP)은 상황이 성숙해지면 국가가 RAF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테러 조직은 "우리는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되는 지점을 견제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념 성명으로 화답했습니다.

RAF의 종말: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들

1998년 4월 20일, 통신사 로이터는 RAF가 "오늘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종료한다"고 선언한 8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입수했습니다. 작성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사 당국은 이 문서가 진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RAF 관련 파일은 여전히 국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범죄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독일 연방형사청(BKA)은 오늘날까지도 이 조직 관련 용의자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