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던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Stanisław I Leszczyński)는 1709년 왕위를 포기해야 했으나, 아우구스트 2세 사후인 1733년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는 프랑스, 스페인, 사르데냐, 바이에른의 지지를 받았으나, 경쟁자 아우구스트 3세(선왕의 아들)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작센의 후원을 받았다. 이 이중 후보 사태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5)을 촉발했고, 전쟁 끝에 스타니스와프는 폴란드 왕위를 포기했다. 그 보상으로 로렌 공국과 바르 공국을 받았다. 평생을 망명과 도피 속에서 보냈음에도 그는 철학자이자 낙천가로 살며, "많이 가진 자가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니라, 적게 욕망하고 가진 것을 누릴 줄 아는 자가 행복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그는 프랑스의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세 왕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정계 입문과 초기 생애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1677년 10월 20일, 16세기부터 폴란드 대귀족으로 군림해 온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포즈나니아의 팔라티누스이자 왕실 재무 대신이었고, 어머니는 스웨덴군과 코사크군을 격파한 명장의 딸이었다. 그는 비엘코폴스카 지역의 레슈노에서 학문, 수학, 문학을 배우고 라틴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18세에는 빈,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 파리 등을 돌며 견문을 넓혔으나, 1696년 얀 3세 소비에스키 국왕 서거로 여정을 중단해야 했다.
레슈노 백작이자 포즈난 주의 수장 자격으로 정계에 입문해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새 국왕 선출을 위한 세임(의회)에 참석했다. 콩티 공작과 전왕의 아들이라는 강력한 경쟁자 사이에서 그는 최종 투표에서 사퇴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를 국왕(아우구스트 2세)으로 추대하는 길을 터주었다. 그는 전왕 미망인에게 의회의 조의를 표하며 탁월한 웅변 실력을 선보였다.
1698년 5월, 21세에 폴란드 대귀족 오팔린스키의 딸 카타르지나 오팔린스카와 결혼해 두 딸 안나(1699년)와 마리(1703년)를 두었다. 아내는 60개 도시와 150개 마을을 지참금으로 가져와, 1703년 부친 라파엘 3세 사후 그는 막대한 영지의 주인이 되었다.
짧았던 첫 번째 폴란드 국왕 시절
스웨덴 왕 카를 12세는 아우구스트 2세가 러시아, 덴마크와 맺은 반스웨덴 동맹을 거부했다. 스타니스와프의 온화한 성품에 매료된 카를 12세는 아우구스트 2세의 "통치 무능"을 내세워 그를 폴란드 왕위에 올리려 했다. 1705년 10월 4일 바르샤바에서 즉위했으나, 아우구스트 2세가 스타니스와프를 납치하려 드는 등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카를 12세의 '보호' 아래 1709년까지 버텼으나, 카를 12세가 러시아 원정에서 대패해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러시아군과 작센군이 바르샤바로 진격해 오자, 스타니스와프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 12세에게 알린 후 슈체친과 스톡홀름을 거쳐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카를 12세 같은 승부사 기질이나 낙관론은 없었기에, 자신이 버티면 폴란드가 더 불행해질 것이라 판단했다. 모든 영지를 잃고 이방 땅에서 난민 신세가 된 그는, 한편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를 되찾았다. 카를 12세의 완강한 만류에도 1712년 겨울, 프랑스 장교로 변장해 오스만 영토의 카를 12세에게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해 퇴위를 간청했고, 카를 12세는 독일 츠바이브뤼켄 공국을 임시 거처로 내주었다.
빈과 로렌 공국을 거쳐 뤼네빌에 닿은 그는 궁핍한 처지에 보석을 저당 잡혔으나, '크론슈타인 백작'이라는 가명으로 숨어든 그를 로렌 공작의 신하 보뷔 씨가 알아보고 보석과 자금을 내어주었다.
1714년 7월 츠바이브뤼켄에 도착해 낡은 성에서 연 7만 크라운의 수입으로 생활을 시작했다. 400명의 스웨덴 주둔군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소비했지만, 그는 순응하며 3개월 후 가족을 불러들였다. 1717년 장녀 안나가 요절하는 슬픔 속에서도 그는 평온한 일상에 적응해 나갔다.
폴란드에서 카를 12세가 여전히 그의 복위를 도모했으나, 1717년 8월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납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1718년 말 카를 12세가 전사하자 그는 다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란다우 인근을 거쳐 1719년 비센부르크에 정착했는데, 이는 오를레앙 공 필리프 섭정이 월 4,000리브르 연금을, 로렌 공작이 3만 리브르 대출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자금난으로 보석을 다시 저당 잡히고, 아우구스트 2세에게 "영지 반환을 조건으로 왕위 포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막내딸 마리의 혼처를 구해야 했으나 가난한 집안에 구혼자는 없었다. 그는 프랑스 장교 아내와의 연애, 철학, 사냥, 산책 등 소소한 삶의 낙을 즐기며 지냈다.
프랑스 루이 15세의 장인이 되다
프랑스에서 스페인 공주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돌려보내진 후, 루이 15세의 신붓감 후보 97명 중 17명만 남았다. 가톨릭이 아니거나 스타니스와프의 딸 마리처럼 가난한 이들이 탈락한 것이다. 섭정 사후 대리 집권하던 부르봉 공작이 마리를 지목했고, 스타니스와프는 흔쾌히 수락했다. 1725년 2월 궁정 화가가 마리의 초상화를 그려 갔고, 4월 초 부르봉 공작이 공식적으로 루이 15세와의 혼인을 청했다.

소식을 들은 스타니스와프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고, 프랑스 궁정도 술렁였다. 하지만 루이 15세는 초상화를 보고 "미인은 아니나 피부가 맑고 눈이 생기 있으며, 교양 있고 온화하며 아버지처럼 큰 친절함을 지녔다"며 흡족해했다. 스타니스와프는 스트라스부르 정부로부터 1만 3천 리브르 대출을 받아 저당 잡힌 보석을 되찾았다.
1725년 8월 15일 대리 결혼식이 치러졌고, 9월 초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폴란드 왕좌를 잃었지만, 미래의 손자가 프랑스 왕좌에 오르리라"며 환희에 젖었다. 1729년 루이 15세는 처가 식구들을 샹보르 성으로 불러들여 소액 연금을 주었으나 성은 텅 비어 있었다. 가난에 익숙한 그는 알뜰히 살림을 꾸렸고, 독실한 아내와 식탐 많은 어머니, 숲속 산책과 독서 속에서 "큰 평온함이 내 삶의 달콤함"이라 읊조렸다. 아우구스트 2세가 살아있는 한 프랑스가 나서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폴란드 왕위는 마음에서 지웠다.
다시 얻은 폴란드 왕관, 그리고 도망
1733년 2월 아우구스트 2세가 서거하자, 아들 아우구스트 3세와 스타니스와프의 옛 충신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 등 여러 후보가 나섰다. 주폴란드 프랑스 대사 몽티 후작은 망명 중인 스타니스와프의 복위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우호 세력을 매수하며, 프랑스 국왕의 지지, 이웃국(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불침공 약속, '삼수리 조약'(독일, 러시아, 프로이센의 폴란드 왕위 요구 봉쇄 조약) 회원국 침공 시 방어 약속 등을 내걸었다.
1733년 3월 몽티가 스타니스와프 파견을 요청했으나 그는 꿈쩍도 않았다. 복위는 확실해 보였으나 폴란드 민심은 알 수 없었고, 용기 있고 냉철했던 그는 프랑스 총리 플뢰리 추기경의 지지가 없음을 간파했다. 전쟁 시 프랑스를 믿을 수 없었다. 결국 8월 브레스트에서 배를 탔으나, 차르 여제의 방해로 코펜하겐에서 발이 묶였다. 결국 독일 상인 서기로 변장해 마차로 이동, 9월 8일 무사히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선거는 11일이었고, 몽티와 비밀 공작원이 완벽히 짜맞춘 작전이었다. 10일 대사관을 나서자 군중이 술렁였고, 11일 3표 기권을 제외하고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5,000명의 폴란드 병사가 탈영했다.
숙명적인 도피자
당선 직후 러시아군 진격 소식에 그는 두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정규군 없는 상태로 다수의 적을 감당할 수 없어 9월 22일 바르샤바를 떠나 단치히로 피신해 프랑스 구원을 기다렸다.

구원은 오지 않았다. 루이 15세는 러시아의 동맹인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에게 선전포고하며 이탈리아 국경 근처 독일 변경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것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트 3세는 1733년 10월 5일, 러시아군 4만, 작센군 2만, 그리고 단치히로 진격하는 3만 6천 병력의 비호 아래 즉위했다.
1734년 4월 구원군이 왔으나 고작 1,950명에 병사당 소총탄 20발뿐이었다. 그들은 적의 규모 앞에 '상식적'으로 철수했다. 러시아의 최후통첩 "단치히의 자유를 위해 폴란드 왕을 넘기라, 아니면 그가 도주하게 놔두라" 속에, 지친 수비군과 대사는 6월 말 탈출 계획을 세웠다. 적초 사이 운하를 지나 비스와 강을 건너 프로이센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플뢰리 추기경이 파병을 거부한 데 격분하면서도 그는 특유의 낙천성으로, 스웨덴 장군과 함께 농부로 변장해 도주했다. 길은 순탄치 않아 안내원들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는 폴란드 왕이자 프랑스 국왕의 장인이었다. 체면 차릴 때가 아니었다. 왕좌가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현상금까지 걸린 수배자 신세였다.
일주일 넘게 운하와 농가, 짐 덮인 마차를 전전하다 7월 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호위병과 연금을 후하게 대접했다. 며칠 뒤 단치히가 함락되었고, 스타니스와프를 따르던 소수 인원은 마리엔부르크 인근 성에 러시아군 포로가 되었다.
베르사유에서는 누구도 왕비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해, 스타니스와프 옹호 소책자가 나돌 정도였다. 그 사이 프랑스 국왕은 '프라그마티카 상크치오(실용 제재)'로 불리는 조약을 체결했다. 로렌 공작 프랑수아 3세가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종식시키고, 프랑스가 바르와 로렌 공국을 얻는 대신 스타니스와프를 그곳에 앉히기로 한 것이다.
바르와 로렌 공국의 통치자, 스타니스와프

2년간의 협상 끝에 1736년 1월 27일, 베르사유의 압박과 딸의 설득("폴란드가 없으면 로렌이 어떻습니까? 왕위 없는 왕보다는 낫지 않습니까?")에 못 이겨 폴란드 왕위 포기 문서에 서명했다. 6월 초 '뫼동 비밀 선언'에 서명하며 "재정과 세입 관리의 번거로움을 프랑스 국왕께 영원히 맡긴다"는 조건으로 연 200만 리브르 연금, 총리격인 수상, 폴란드 국왕 명예 칭호를 받았다. 통치하되 다스리지는 않는, 그가 평생 체득한 철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였다.
플뢰리 추기경이 밀었던 안투안 쇼몽 드 라 갈레지에르가 1737년 2~3월 공국을 인수해 실권을 장악했다. 4월 3일 뤼네빌에 입성한 스타니스와프는 냉담한 민심 속에서도 23년 전 인연이 있던 보뷔 씨의 도움으로 그의 저택에 머물렀다. 그는 낡은 뤼네빌 성과 가구 없는 바르 성을 복구하며, 29년간 이 땅을 다스리며 사랑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비로운 공작' 스타니스와프
도착 즉시 국무원, 재무원, 상무원을 구성하고 사재를 털어 공공사업을 벌였다. 기근 대비, 사고·질병·장애 대비 사회보장제도 성격의 기금을 조성하고, 빈민을 위한 무료 법률 상담을 도입했다. 1748년에는 '학교 형제회' 수도회를 설립하고 낭시의 여러 학교 무상 입학을 지원했다. 수상(샤를로니에)이 프랑스 법을 강요하려 들면 그는 특유의 유연함으로 "꼼수"를 부려 로렌의 관습을 지켰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발발 전까지 순조로웠다. 3년 뒤 독일군 진격에 프랑스군이 스트라스부르에 묶여 있자 메스로 피신했다. 1746년 돌아와 1744년 소실된 성을 복구했다. 1747년 3월 왕비 카타르지나가 별세하고, '쾌락의 귀부인' 부플레르 후작부인이 정부가 되었다. 그는 디저트 사랑으로 마른 쿠겔호프에 럼주를 부어 '바바(Baba)'를 발명했다. 망명 시절 동지들(티앙주, 솔리냑 기사, 테르시에)을 불러 모으고, 1747년 몽테스키외, 1748~1749년 볼테르를 맞이했다. 그의 궁정은 베르사유보다 "숨쉬기 편하고", 지성을 사랑하는 평화의 안식처였다.
뤼네빌과 낭시의 건축가

뤼네빌 성 대공사에는 어전(옥좌) 신설, 정원 재설계, 터키풍 정자, 중국풍 정자, 1742년 '바위(Rocher)'에 설치된 88개 오토마타(자동 인형), 총신들을 위한 '샤르트뢰즈' 별장 신축 등이 포함되었다. 멀리서 구경꾼이 몰려들었으나, 스타니스와프 사후 루이 15세가 성을 병영으로 개조하며 이 모든 것은 점차 파괴되었다.
낭시에서는 1738년 노트르담 드 봉스쿠르 성당을 짓고, 중세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했다. 1755년 준공된 왕립 광장(현 스타니스와프 광장), 1750년 대공립 도서관과 왕립 과학·문학 아카데미, 1752년 왕립 의학 대학을 설립해 도시를 문화의 중심으로 꽃피웠다.
로렌의 비극적 최후
1766년 2월 5일, 스타니스와프는 벽난로에 너무 다가갔다가 딸이 선물한 모피 가운에 불이 붙었다. 직접 진화하려다 화염 속으로 넘어졌다. 시종이 들어왔을 때, 몸 한쪽이 심하게 타고 한 손은 숯처럼 검게 그을린 뒤였다.
17일 후인 2월 23일, 88세로 영면했다. 유해는 왕비 카타르지나 오팔린스카와 함께 노트르담 드 봉스쿠르 성당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루이 15세와의 약정에 따라 낭시는 프랑스령이 되었고, 1831년 시민들은 왕립 광장 중앙에 동상을 세우고 이렇게 새겼다. "자비로운 스타니스와프에게, 감사의 로렌이."
참고 문헌
- 자크 르브롱,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평전』, 페랭, 2009.
- 안 무라토리-필립, 『스타니스와프 왕』, 역사 인물전, 파야르, 2000.
- 기 카부르댕, 『스타니스와프가 로렌을 다스리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