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당의 방패이자 검' 슈타지 — 동독을 감시한 40년의 흥망성쇠

1950년 2월 8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 국가보안부(MfS), 이른바 '슈타지'가 공식 설립되었다. 창설 직후부터 국가 전체를 뒤덮는 철저한 감시망 구축이 본격화되었고, 이는 1990년 독일 통일 때까지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졌다.

1950년 2월 9일자 슈베린 지역 신문 '란데스-차이퉁(Landes-Zeitung)'은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안건이 법률로 제정되다"라는 제목 아래 전날 열린 인민의원회 제10차 전체회의 결과를 상세히 보도했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새 청소년법 채택이었지만, 정작 핵심 소식은 기사 끝에 짧은 부록 형태로 등장했다. "내무부 장관 카를 슈타인호프의 설명에 따라 국가보안부 설립법도 채택되었다." 당시 슈베린 독자들은 이 한 문장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방위적 감시 네트워크

국가보안부(MfS)의 창설과 함께 동독에서는 포괄적 감시 네트워크의 체계적 확장이 시작되었다. 말기에는 전국에서 약 91,000명의 전속 요원과 약 18만 명의 비공식 협력자가 이 비밀 정보기관을 위해 활동했다. 슈타지는 정치 비밀경찰이자 형사수사 기구였으며, 반대파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해서도 표적화된 조치를 취했다. 이들은 교활한 감시·고발·심문 수단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슈타지는 이른바 '분해(Zersetzung)'라 불리는 심리전 기법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공적 평판에 대한 체계적인 훼손'이나 '상호 불신과 의심 조성' 등이 포함되었다.

'적'의 규정

내무부 장관 슈타인호프는 새 국가보안부 설립을 정당화하며, 그 임무가 국영 기업과 운송 시스템의 보호, 사보타주 세력의 제거, 그리고 내부 '악의 무리'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아직 어렸던 동독의 '적'에 대한 개념이 규정되었고, SED 정권에게 이를 넓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남겨졌다.

1주일 뒤 인사 문제가 발표되었다. 소련 점령군의 신뢰를 받던 빌헬름 차이서(Wilhelm Zaisser)가 베를린 노르마넨슈트라세에 본부를 둔 새 부처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훗날 슈타지의 실질적 얼굴이 되는 에리히 밀케(Erich Mielke)는 초기에는 국무차관 자리에 머물렀다.

"당의 방패이자 검"

소련 모델을 본뜬 이 새로운 비밀기관의 임무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의 결정을 집행하고 당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었다. 슈타지는 스스로를 '당의 방패이자 검'이라 여겼다.

"처음에는 5개 주에 각각 주 행정국이 있었습니다." 포츠담 현대사연구센터의 옌스 기제케(Jens Gieseke) 연구원이 설명한다. 그는 연방 슈타지 기록관리청(BStU) 소속으로 오랫동안 이 주제를 연구해 왔다. "진짜 전환점은 1952년이었습니다. 구(舊) 주 체제가 지구(Bezirk) 체제로 전환되면서 15개 지구 행정국이 설립된 것입니다."

발터 울브리히트 정부 하에서 슈타지는 감시망 확장에 나섰다. 동시에 모든 도시·농촌 지구에 지구 사무소를 건립하고 인력을 대폭 늘렸다. 1952년 7월 SED 제2차 당대회에서 울브리히트가 '계급투쟁의 강화'를 선언하자, 슈타지의 전속 인력은 약 8,800명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더딘 북부의 발전

슈베린, 노이브란덴부르크, 로스토크 등 북부 3개 지구에서는 구조와 감시망의 발전이 초기 몇 년간 다소 더디게 진행되었다. 기제케에 따르면 작센, 작센안할트, 튀링겐이 이 네트워크 확장의 선두 주자였다.

1953년에는 비밀리에 준비된 '로제 작전(Operation Rose)'의 일환으로 국가가 동독 북부 호텔·펜션 업주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들의 휴양 시설은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FDGB)에 넘겨졌고, 400명 이상이 체포되어 특별재판소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몰수 조치는 이미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동독 주민들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었다.

같은 해 전국의 노동자들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강제한 노동 할당량 인상에 항거했다. 베를린, 작센, 튀링겐 등 다른 지역에서는 6월 17일 이미 민중 봉기가 한창이었지만, 북부에서는 하루 뒤에야 시위가 일어났다. 주로 비스마르, 슈트랄준트, 로스토크 같은 항구 도시들이 중심이었다. 인민경찰, MfS, 소련군은 인구가 희박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머른 지역에서 이 움직임을 싹틔우기도 전에 짓밟아 버렸다.

MfS 수뇌부의 변화

그러나 노동자·농민의 시위가 향했던 SED 권력은 뿌리까지 크게 흔들렸다. 시위대는 심지어 MfS 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BStU에 따르면 그 결과 동독에서 13,000~15,000명이 체포되었고, 소련 군사법정에 의해 18명이 처형되었다.

슈타지 수장 차이서는 울브리히트 정부의 눈밖에 나게 되었고, 1953년 7월 '반당 분파 활동'을 이유로 장관직에서 파면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에른스트 볼베버(Ernst Wollweber)가 취임했다. MfS는 국무서기처로 격하되었고, 2년 후에야 다시 부처 지위를 회복했다. 볼베버 시대는 1957년까지 이어졌고, 이후 에리히 밀케가 동독 국가보안의 수장이 되어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감시 네트워크의 팽창

1960년대 후반부터, 그리고 좀 더 본격적으로는 호네커 정부 들어 '예방적 치안 국가'가 확대되었다고 기제케는 말한다. "핵심은 사회 전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이탈 가능성을 미리 간파하여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970년대부터 인원수가 폭증했다.

기제케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과제는 서독과의 기본조약과 새로운 동방정책으로 다시 강해진 서방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결국 밀정과 감시로 이루어진 사실상 완전한 네트워크가 완성되어 동독 주민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했다. 이것이 노선에 충실한 새 슈타지 수장이 세운 '공'이었다.

물론 이러한 발전이 동독 북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슈타지는 곧 로스토크 지구에 잠복한 위험을 인식했다. 동독 선원들이 출항하고 국제선원들이 내리는 항구는 해외로 도피할 잠재적 통로였다. 그래서 별도의 부서가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이 지역은 동독 주민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이기도 했는데, 바다와의 근접성은 물을 건너 도주하려는 시도를 부추기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MfS 입장에서 감시 수요는 계속 커졌고, 그 결과 로스토크 지구 행정국은 확장되어 1980년에는 3,072명을 거느린 동독 15개 사무소 중 최대 규모가 되었다. 1989년에도 3,827명의 전속 직원으로 포츠담에 이어 2위를 유지했다. 비교하면 다른 두 북부 지구 행정국의 규모는 훨씬 작았다. 슈베린은 약 2,300여 명, 인구가 희박한 노이브란덴부르크에는 최근 기준 약 1,900명의 전속 직원이 근무했다.

슈타지의 종말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형세는 급변했다. 슈타지는 순식간에 북부를 포함한 동독 주민 전체의 표적이 되었다. 12월 첫째 주에 시민권익운동가들은 슈베린, 노이브란덴부르크, 로스토크의 사무소를 점거하고 기록물 인계를 요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서들이 파쇄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슈타지는 잠시 '국가안전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한 뒤 1990년 초 정부 결정으로 해산되었다. 이후 시작된 험난한 사료 정리 작업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초기 단계는 로스토크 출신 목사가 크게 이끌었다. 1991년 초대 연방 슈타지 기록관리청장이 된 요아힘 가우크(Joachim Gauck)가 바로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