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마지막 그리스인' 필로포이멘, 스파르타를 무너뜨리다 — 기원전 207년 만티네이아 전투

 마지막 그리스인  필로포이멘, 스파르타를 무너뜨리다 — 기원전 207년 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207년, 그리스는 다시 한번 내분으로 찢겨나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아카이아 동맹과 스파르타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 참주 마카니다스 치하의 스파르타는 강력한 군대를 규합하고, 동맹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펠로폰네소스의 패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반면 필로포이멘이 지도하는 아카이아 동맹은 마침내 도리아계 도시 스파르타마저 품에 안아 펠로폰네소스를 정치적으로 통일하고, 외부 세력의 개입을 차단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개혁된 아카이아군

필로포이멘은 동맹군을 과감히 재편했다. 보병은 사리사(sarissa)로 무장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진형을 채택했고, 중기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헤타이로이처럼 긴 창을 갖춘 돌격 전력으로 탈바꿈시켰다. 여기에 타란토식 경기병도 운용했다.

타란토식 경기병은 고대 세계에서 현대의 '크로아티아 기병'이나 '후사르'만큼 유명한 병종이었다. 최초의 부대는 타라스(타란토)에서 창설되었지만, 이후 운용이 일반화되면서 명칭은 출신지가 아니라 하나의 기병 유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들은 대형 방패, 투구, 검, 투창을 장비하고 개방진(散開陣)으로 싸웠다.

동맹군은 여기에 용병 부대와 비정예 펠타스트(방패병), 그리고 궁수·투창병·투석병 등 경장보병으로 보강되었다. 스파르타군은 중장보병 면에서는 이에 대등했고, 숙련된 용병 펠타스트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병 전력에서는 열세였으며, 상당수의 프실로이(psiloi, 경장병)를 운용하고 있었다.

양군의 충돌

기원전 207년, 두 군대는 만티네이아에서 격돌했다. 양측이 배치한 정확한 병력은 알 수 없지만, 사료의 맥락으로 미루어 볼 때 양측 모두 약 2만 명 규모를 동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로포이멘의 배치

필로포이멘은 좌익 인근 언덕에 경장보병을 올리고, 그 오른쪽에는 판갑기병과 일리리아 용병을 배치했다. 좌익은 '타란토식' 기병이 엄호했다. 중앙에는 해자(壕) 앞에 팔랑크스를 세우고, 우익에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정예 기병을 두었다.

마카니다스는 자신의 우익 선두에 직접 나섰는데, 그곳에는 '타란토식' 기병과 베테랑 용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팔랑크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배열했고, 투석기(catapult)까지 운용했다.

전투의 흐름

필로포이멘은 수동적으로 버티며 투석기의 포화를 감내하는 대신, 경기병을 이끌고 투석기를 역습했다. 마카니다스는 즉각 자신의 경기병으로 반격에 나섰고, 전투가 커지면서 양군의 용병 펠타스트들도 차례차례 합류했다. 그러나 이 국지전에서는 스파르타 측이 우세해 적을 무질서하게 몰아붙였다.

그 순간 필로포이멘은 전선을 회전시켜 빈틈을 드러낸 스파르타 팔랑크스의 측면을 강타해 궤멸시켰다. 마카니다스가 추격을 멈추고 본대로 복귀하려던 때는 이미 늦었다. 병사들은 지휘관과 함께 와해되어 도주했고, 필로포이멘은 도주하던 마카니다스를 발견해 자신의 창으로 직접 쓰러뜨렸다.

결과와 의의

스파르타군은 완전히 붕괴했다. 최소 4,000명의 스파르타 병사가 목숨을 잃었으며, 다수가 항복한 용병들의 사망자 수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이 승리로 필로포이멘의 명성은 펠로폰네소스 전역에 높이 평가받았고, 그는 로마 시대 작가들로부터 '마지막 그리스인'이라 불릴 만큼 그리스 군사 전통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만티네이아의 승리는 아카이아 동맹이 펠로폰네소스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