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티나: 발칸 운명을 좌우한 요충지
11세기 초, 세티나(오늘날 그리스 플로리나 현의 스코포스 마을)는 특별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요충지였다. 불가르 차르 사무일은 이곳에 중요한 요새를 건설하며 방어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러나 1014년, 사무일의 군대는 유명한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르인 학살자(Bulgaroktonos)'라는 별칭을 지닌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세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차르 살해와 전쟁의 재개
전투 직후 사무일이 사망하자 비잔틴 군대는 마케도니아의 여러 도시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불가르 국가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1015년,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사촌이자 사무일의 후계자인 가브릴 라도미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로마인, 즉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전쟁을 이어가며 비토라 전투에서 제국군을 격파했고, 페르니크(고대 아그리아니족의 옛 수도)에 대한 포위를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1017년, 바실리우스 2세의 대공세
1017년, 바실리우스 불가록토노스는 강력한 대군을 이끌고 불가르 점령지를 침공했다. 이 부대에는 정예 바랑기아 근위대 한 개 분견대까지 증원되어 있었다. 황제의 목표는 카스토리아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불가르 측은 동부 불가리아에서 대규모 양동 작전을 시도하며 페체네그족과의 동맹을 추진했다.
바실리우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경계하여 카스토리아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결국 불가르의 양동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아마도 바실리우스의 외교적 개입 덕분에 페체네그족이 불가르와의 동맹을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세티나 전투: 매복과 역전의 극
더 이상 방해받을 것이 없어진 황제는 곧바로 남하하여 세티나의 불가르 요새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즉시 비잔틴군을 격퇴하기 위해 진군했다. 바실리우스는 장군 콘스탄티노스 디오게네스를 불가르군 상대로 파견했으나, 불가르군은 이미 매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디오게네스의 부대는 극심한 압박에 몰려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황제 친정군이 즉시 구원에 나서면서 전황은 급반전되었다. '불가르인 학살자'의 군대를 눈앞에 확인한 순간 불가르군은 무참히 도주했고, 디오게네스와 그의 병사들은 이들을 끝까지 추격했다.
작은 전투, 거대한 전략적 의미
양측 군대의 규모나 사상자 수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연대기 작가 스킬리체스에 따르면 불가르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2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 자체는 큰 전술적 의미를 갖지 못했지만, 전략적으로는 결정적인 가치를 지녔다.
새 차르의 패배는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입지를 극도로 위태롭게 만들었다. 권위를 재확인하기 위해 그는 얼마 후 두라초(디라키움) 공격에 나섰으나, 스킬리체스의 기록에 따르면 비잔틴 장교 니키타스 페고니테스와의 일대일 결투 끝에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몇 달 뒤 불가리아는 항복했고, 오랜 전쟁을 종식시키며 비잔틴 제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결국 1017년 세티나에서 벌어진 이 교전은 규모는 작았지만 불가르 제1제국의 최후를 앞당긴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바실리우스 2세의 이름이 '불가르인 학살자'로 역사에 새겨진 데에는 이런 알려지지 않은 승리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