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45년 벨젠 재판: 최초의 나치 전범 재판이 남긴 민주주의의 교훈

1945년 11월 17일, 독일 뤼네부르크의 영국군사법원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경비대원들에게 사형과 징역형은 물론 무죄 판결까지 선고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나치 전범 재판은 단순한 응징을 넘어 민주주의의 '교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두 달 전인 1945년 9월 17일, 국가사회주의(나치) 범죄가 뤼네부르크의 영국군사법원에서 처음으로 공식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가 해방된 지 불과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당초 수용소 행정 관계자 48명이 기소되었으나 3명은 질병으로 심리를 받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SS 대원, 수용소 경비대원, 소위 '수감자 감독관' 등 44명이 피고석에 섰습니다. 수용소 사령관 요제프 크라머(Josef Kramer)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베르겐-벨젠 사령관, '벨젠의 짐승' 요제프 크라머

수용소 해방 후 전 사령관 요제프 크라머는 족쇄를 차고 수용소 경내를 가로질러 이동했습니다. 당시 뉴스 영화는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 남자가 바로 세상이 '벨젠의 짐승'이라 부르는 요제프 크라머입니다." 피고인 다수는 이미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서 같은 직책으로 복무한 전력이 있었고,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고 빠져나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독일 영토에서 열리는 최초의 영국군사법정 전쟁범죄 재판은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렸습니다.

증인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세상에 법이 존재함을 보여줘야 했다"

1943년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뒤 베르겐-벨젠으로 옮겨진 첼리스트 아니타 라스커-발피쉬(Anita Lasker-Wallfisch)는 이른바 '벨젠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그녀는 몇 년 전 NDR과의 인터뷰에서 재판 과정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참상의 실체는 이 재판 이전까지 일반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라스커-발피쉬는 "세상에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며 동시에 "베르겐-벨젠에서 일어난 일과 같은 곳에는 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검찰의 몫, 그리고 증인석의 한계

1945년 9월 뤼네부르크 영국군사법원에 세워진 피고인 40여 명의 혐의는 전쟁범죄, 전쟁법 위반, 학대에 의한 살인이었습니다. 영국은 나치 폭정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고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법 절차를 엄격히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사법 절차가 사건의 진상을 온전히 밝혀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라스커-발피쉬는 회상했습니다. "그게 무슨 요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였는지도요. 그러면 더 이상 유력한 증인이 아닙니다." 사실에 근거해 결론을 내려야 하는 법정에서 피해자들은 개별 사건으로 쪼개기 어려운 경험을 진술해야 했습니다. "정말 화가 났습니다. 저는 시계가 없었으니까요. 누군가를 때려 죽였다, 오후 3시, 화요일, 그걸 기억해 두어야 한다니. 법정에서 늘 나오는 질문이었지만, 그곳에는 정상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재판의 중심, 이르마 그레제와 요제프 크라머

특히 두 명의 피고인이 재판의 중심에 섰습니다. 라벤스브뤼크·아우슈비츠·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간수로 근무한 이르마 그레제(Irma Grese)와 베르겐-벨젠 및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사령관이었던 요제프 크라머(Josef Kramer)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저 거기 앉아 있었습니다. 아주 조용히." 라스커-발피쉬가 회상했습니다.

'모범적인 아버지'를 자처한 크라머

1991년에 사망한 언론인 악셀 에게브레히트(Axel Eggebrecht)는 독일 공인 언론 대표 3인 중 한 자리에서 재판을 참관했고, 특히 크라머에 대한 심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 살았습니까? — 수용소 안에요. — 밖은 안 됩니까? — 수용소 바로 옆이에요. 철조망이 우리 정원 바로 뒤에 있었어요." 그 정원에서 약 100야드(약 90미터) 떨어진 곳에는 시체 더미가 쌓여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거기서 놀았습니까? — 네, 그랬을 수도 있어요. — 당신은 좋은 아버지입니까? — 물론이죠."

사형 11건, 징역 18건, 무죄 15건

1945년 9월부터 11월까지 신문들은 재판의 세부 사항을 매일 보도했습니다. 상세한 보도은 '재교육(Re-education)' 정책의 일환이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평결은 11월 17일 선고되었습니다. 피고인 11명에게 사형, 1명의 종신형을 포함해 18명에게 징역형, 15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재판 기간과 평결은 연합국 내에서 때때로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대다수 관찰자의 관점에서 이 절차는 공정성,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결론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벨젠 재판, "민주주의의 교훈"

참관 기자 에게브레히트는 "이것은 정말 민주주의의 교훈이 되었다. 군사법원! 거기서는 재판이 상당히 자의적으로 진행될 거라고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었다"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당시 목격자였던 라스커-발피쉬도 이 과정에 감명을 받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뤼네부르크는 그곳이 첫 번째 재판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습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말입니다." 국가사회주의 범죄를 규명하는 첫걸음, 그때부터 가해자는 더 이상 외면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가해자와 공범에 대한 재판은 간헐적으로 이어졌지만, 고령으로 인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그쳤습니다. 2020년 7월 함부르크 지방법원은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발생한 5,232건의 살인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93세 전 수용소 간수에게 형 집행 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범죄에 연루된 고 오스카 그뢰닝(Oskar Gröning)은 2015년 뤼네부르크 지방법원에서 30만 건의 살인 방조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