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슈바이크 출신 윌리 메이어(Willi Meyer)는 1944년 고향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그리고 1945년 4월 미군이 도시에 진입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경험한 생존자다.
82세의 윌리 메이어는 지금도 1944년 10월 15일 밤을 결코 잊지 못한다. 전쟁 종결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브라운슈바이크에 가장 혹독한 폭탄 비가 쏟아진 바로 그날 밤이다. 당시 12세였던 은퇴한 배관공은 "폭격 경보는 우리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사이렌이 울려도 그는 어머니와 체스를 두며 평소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레오폴트슈트라세(Leopoldstrasse) 4번지의 집에 시한폭탄이 떨어졌다. 그는 부모님과 이웃 주민들과 함께 지하실로 대피해 출입문을 막았고, 폭격이 멎은 뒤에야 겨우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불과 40분 동안 그 부지에는 소이탄 26발과 인살탄 2발이 떨어졌다. 아버지의 배관 공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에 내려온 가장 강력한 공격
그날 밤 브라운슈바이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강력한 폭격을 받았다. 영국군 항공기는 '사자의 도시'에 20만 발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다. 소이탄과 인살탄은 도시를 화염의 지옥으로 만들었고, 화재폭풍은 이틀 동안 시내를 집어삼켰다. 윌리 메이어는 "열기가 너무 강해서 벽을 타고 오른 벽지가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고, 집이 불길에 휩싸일 위기에 처했다"고 기억한다. 가족들은 가구를 모두 치워놓고 물에 적신 담요, 모래, 물로 아파트를 지키려 애썼다. 아버지 윌리 메이어 시니어는 안뜰에서 불씨를 직접 진압하려 했다. 가연성 물질에 불티가 튀면 진화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기술 구호대에서 소방 훈련까지 받은 배관공 시니어는 집이 완전히 불타 없어지는 것을 막아냈다. 생계 수단인 배관 공장 역시 함께 지켜낸 것이다. 메이어는 "나는 운이 좋았다. 가업도 집도 없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테니까"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변은 온통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골목 풍경 대신 잔해 산
아버지의 배관 공장은 폭격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이 불길에 삼켜졌다. 당시 약 300만 입방미터의 잔해가 브라운슈바이크의 도시 풍경을 뒤덮었다. 건물의 90%가 폐허가 되었고, 무너지거나 전소한 집들 사이에서는 길을 알아보기조차 어려웠다. 그럼에도 윌리 메이어와 어머니는 조부모님 댁으로 향해야 했고, 몇 미터나 되는 잔해 더미를 넘어야만 했다. 그는 "돌이 워낙 뜨거워서 잔해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게 기억난다. 그렇지 않으면 발이 델 정도였다"고 말한다. 이 공습으로 공식적으로 약 600명이 목숨을 잃었고, 8만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철도와 도로망, 가스와 상수도 공급 등 도시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다. 배관공 시니어는 공습 직후 아파트가 얼마나 붐비게 되었는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폭격을 당한 사람들은 시골 농가 헛간 같은 임시 숙소로 수용되었다. 한 가족이 우리와 같은 숙소에 들어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마이어 가족의 작은 아파트에는 세 식구가 아니라 여섯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다.
탐내던 껌
1945년 4월 12일, 미군이 브라운슈바이크를 해방했을 때 많은 주민들은 도시의 24개 벙커 속에서 버티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불안에 떨던 윌리 메이어도 그중 하나였다. 독일군과 미군이 끝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무서웠다"고 회상한다. 사람들은 벙커 안에서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인민수신기 라디오에서는 나치 지도부의 선전가들이 여전히 '최후의 승리'와 '하르츠 요새'를 운운하고 있었지만, 이미 미군 전차는 거리를 굴러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감히 밖으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항복의 표시로 창밖에 흰 천을 내걸었다." 열두 살 소년에게 그것은 특별한 순간이었다. 미국 GI들이 빡빡하게 훈련된 독일 국방군 병사들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껌 있어?' 나는 곧바로 물었다. 우리는 늘 미국인들에게서 뭔가를 얻으려고 했다."
아무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윌리 메이어는 자신이 겪은 일을 오래도록 기록해 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는 27권의 사진 앨범을 만들고 수많은 신문 기사를 스크랩했다. 아무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전쟁이 드디어 끝났을 때 안도감이 들긴 했지만, 음식을 구하는 일 등 여전히 큰 어려움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전쟁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책으로 남겼다. 전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버지의 가업을 어떻게 이어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들 잉고(Ingo)에게 그 가업을 자랑스럽게 물려주었는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