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Henning Strüber
제2차 세계대전 말기, 300만 명이 넘는 독일군 병사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진 속 이곳은 모스크바 근교의 포로수용소입니다.
“메클렌부르크-포메라니아 지역에서 재소집된 소련 제5근위군이 우리 부대를 템플린(Templin)과 리헨-노이브란덴부르크(Lychen-Neubrandenburg), 안클람(Anklam) 사이의 호수 지대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는 1945년 4월 29일자 독일 국방군(Wehrmacht) 최고사령부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붉은 군대의 선봉 부대가 오늘날의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 지역에 도달했을 무렵, 전쟁의 승패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약 100km 남쪽에서는 베를린을 놓고 마지막 대규모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제3제국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히틀러는 4월 30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메클렌부르크-서포메라니아는 대규모 전면전은 피했지만, 죽음과 굶주림, 도피, 추방, 강간, 전염병이라는 전쟁의 모든 공포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난민 행렬이 예고한 임박한 파국
파국의 조짐은 이미 1945년 초부터 나타나 있었다. 동프로이센에서 처음 대거 유입된 피난민들을 통해 붉은 군대의 진격과 그들이 자행한 만행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고, 나치 지도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무너지고 공포는 번졌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피 행렬에 합류했고, 일부 나치 간부들은 방어를 명목으로 최후 병력을 동원해 놓고는 은밀히 먼저 도주했다. 로스토크(Rostock)와 비스마르(Wismar)는 '요새 도시'로 선포되었다. 연합군의 폭탄이 하늘에서 쏟아져 주거 지역의 3분의 1 가까이가 파괴되었다. 난민들로 과밀해진 선박이 항구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다시 홀슈타인 방면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우리를 러시아인에게서 멀리 데려가 달라”는 절규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상황은 갈수록 혼란스러워졌고 물자 공급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동부 도시들에 남은 깊은 상흔
적군이 도착했을 때 많은 지역에서는 '최후까지 저항하라'는 명령이나 다리와 건물을 폭파하라는 명령이 무시되었다.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는 4월 30일 전투 없이 넘겨졌다. 그러나 저항이 벌어진 곳에서는 도시가 포격을 받았고, 피해는 주로 주 동부 지역에 집중되었다. 4월 29일, 진격하는 붉은 군대는 독일군이 방어하던 프리틀란트(Friedland)와 노이브란덴부르크(Neubrandenburg)를 점령했고, 두 도시의 시가지는 거의 완전히 불탔다. 4월 30일에는 알트슈트렐리츠(Alt-Strelitz)의 65%가 파괴되었고, 말힌(Malchin)에서는 도시 대부분이 화염에 휩싸였다. 노이슈트렐리츠(Neustrelitz)에서는 성과 극장 등 여러 건물이 불에 탔다. 추가 파괴가 막을 내린 것은 시청 앞에서 폭파 작업 중단을 요구한 약 200명의 여성들의 결단 덕분이었다.
대규모 자살과 성폭력의 기록
특히 여성들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련군의 독일 진격이 있었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데민(Demmin)은 전쟁이 남긴 심리적 공포를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5월 1일 밤, 난민들로 넘쳐나던 이 작은 도시는 적군 병사들의 약탈에 시달렸다. 술에 취한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질렀고, 시내 중심가는 며칠 동안 타올라 연기 나는 폐허로 변했다. 같은 날 한 약사가 '승리 축연'에서 소련 장교들에게 내린 포트주에 독을 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보복은 즉각적이었고, 그 희생자는 특히 여성과 소녀들이었다. 데민 도시 연대기 작가 하인츠-게르하르트 콰트(Heinz-Gerhard Quadt)는 이렇게 회고했다. “10살 소녀부터 80세 할머니까지, 모두 강간당했습니다.”
데민, 강에 떠다닌 시신들
항거한 남성들은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다. 이후 며칠 사이 약 1,0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치심이나 보험 몰수를 피하기 위해 많은 사례가 은폐되었기에 실제 숫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톨렌세(Tollense)강, 페네(Peene)강, 트레벨(Trebel)강 기슭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방황하던 여성들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불확실성과 절망 속에서 노이브란덴부르크에서도 약 3,000명이 자살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벌어진 비극
비극은 바다에서도 이어졌다. '빌헬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호의 침몰에 이어, 5월 3일 영국 전투기의 공격으로 '카프 아르코나(Cap Arcona)'호가 침몰한 사건은 최악의 참사 중 하나로 꼽힌다. 7,000명에 달하는 사망자 중 약 6,000명은 노이엔가메(Neuengamme)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이었다. 그 후 며칠간 비스마르 근처 푀엘(Poel) 섬 해변에는 수백 구의 시신이 밀려왔다. 로스토크에서는 난민 대신 나치 요인들을 태우라는 명령을 거부한 선장이 SS의 총에 쓰러졌다. 전쟁의 마지막 날, 붉은 군대가 이미 메클렌부르크에 진주한 뒤에도 6만 명이 넘는 난민과 군인, 부상자가 로스토크와 비스마르에서 군함과 상선을 타고 서쪽으로 이송되었다. 한편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수용소의 2만 명이 넘는 수용자들의 고된 행군은 슈베린 근처 라벤슈타인펠트(Raven Steinfeld)에서 끝을 맺었다. 이들은 슈베린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했고, 지칠대로 지친 생존자들은 미군에 의해 구조되었다. 죽음의 행진 과정에서 약 7,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7월, 슈베린 근교에서 맞이한 러시아와 서방 연합군의 악수
고작 5일 후인 5월 3일, 전쟁은 끝난다. 슈베린 근교에서는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Konstantin Rokossovsky) 원수가 이끄는 붉은 군대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원수 휘하의 서방 연합군 병사들이 악수를 나눈다.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히(Kurt von Tippelskirch) 장군이 지휘하는 제21군은 루트비히스루스트(Ludwigslust) 근교에서 미군에 항복했고, 15만 명의 독일군이 서방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귀중품마저 전리품으로 내주어야 했다. 당시 경계선은 비스마르-슈베린호-루트비히스루스트-뫼미츠(Dömitz) 동쪽에 걸쳐 있었다. 슈베린과 서메클렌부르크는 7월 1일 소련이 접수하기 전까지 미국과 영국이 먼저 점령했다. 그러나 얄타 회담의 결정에 따라 경계선은 다시 서쪽으로 옮겨지게 된다.
무너진 공급망, 이어진 고통
항복 이후, 이미 극심했던 지역 주민과 난민들의 생활은 완전히 붕괴한다. 당시 이 지역에는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부모를 잃은 약 3만 명의 아이들이 방황하고 있었다. 혼란 속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1945년 여름 시작된 발진티푸스 유행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공공 질서를 회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세월 역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불의를 안겼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2,000곳이 넘는 농장이 몰수되었고, 노이브란덴부르크 근처 퓐파이헨(Fünfeichen) 특별수용소에서는 7,000명이 넘는 수용자가 고갈과 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곳에는 구 정권의 지지자들뿐 아니라 기업가, 그리고 비판적 성향의 사회민주주의자들까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