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1월 8일, 약 1,000명의 함부르크 유대인이 벨로루시 민스크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이송 도중과 이후의 학살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나치는 전쟁 기간 동안 함부르크에서 유대인과 신티·로마니 등 약 8,000명을 추방했습니다.
이른바 '사형 선고'는 하루 전인 1941년 11월 7일, 함부르크의 수많은 유대인 가정에 동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날 20세의 하인츠 로젠베르크(Heinz Rosenberg)는 여동생 이름가르트(Irmgard), 부모님과 함께 수백 명의 다른 유대인들처럼 SS 특무대의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정착이라는 미명 아래 강행된 강제 이송
함부르크에 살던 하인츠 로젠베르크는 벨로루시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추방 유대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통지서의 지시는 단호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짐을 꾸린 여행가방을 들고 무어바이덴슈트라세(Moorweidenstraße)의 옛 산책 홀 앞으로 집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파트 열쇠는 출발 전 가장 가까운 경찰서에 제출해야 합니다. 아파트와 그 내용물은 매각되거나 훼손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재산, 계좌, 현금 및 귀중품은 이에 따라 몰수됩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나치가 내세운 명분은 독일계 유대인들의 '동부 대규모 정착'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로젠베르크 일가는 그해 여름 독일군이 침공해 점령한 벨로루시로의 추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유럽 유대인이 소련 점령지로 강제 이송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민스크행 열차와 그 후 몇 년간의 지옥을 견뎌낸 극소수의 생존자가 되었고, 함부르크와 벨로루시의 수만 명 유대인이 어떤 공포에 직면했는지는 그의 수기 덕분에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정부의 적"으로서 재산권마저 박탈당하다
출발에 앞서 나치는 모든 유대인에게 다음 문구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아래 서명한 유대인으로서 나는 내가 독일 정부의 적이며, 따라서 내가 남기는 재산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없음을 확인합니다. 나의 독일 시민권은 이로써 박탈되며, 1941년 11월 8일부로 무국적자가 됩니다."
이후 그들은 무어바이덴슈트라세에서 경찰차로 현재 하펜시티(Hafencity) 자리에 있는 하노버셔 역(Hannoverscher Bahnhof)으로 이송되어 열차에 밀려 넣어졌습니다. 목적지는 민스크. 로젠베르크는 그 여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마차에는 난방이 없었고, 객실은 사람과 수하물로 터져 나갈 듯 붐볐습니다. 정차할 때마다 SS 경비병들이 권총을 뽑아 든 채 열차 전체를 에워쌌습니다."
추방자들에게 강요된 시신 처리
약 1,000명의 사람들은 3일 반 동안 칸막이로 나뉜 좁은 마차 안에 짓눌린 채 이동했습니다. 민스크 역에서 내린 그들이 행군한 곳은 훗날 '함부르크 게토'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독일과 유럽 여러 도시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수용될 예정이었습니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수용소 안에는 낡은 학교 건물이 있었고, 도착자들은 그곳에 수용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선 순간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시신이 곳곳에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기존 게토에 살던 벨로루시 유대인들은 함부르크 추방자들이 SS로부터 소환장을 받던 바로 그날, 독일 제국 추방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나치의 학살 작전에서 총살당했던 것입니다.
폭력의 위협 속에서 SS는 수용자들에게 시신 처리를 강요했습니다. 살해당한 이들의 마지막 식사가 아직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시신은 마당으로 옮겨졌고, 남은 짐들은 창밖으로 던져진 뒤 마당에서 불태워졌습니다." 로젠베르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물도, 빛도, 난방도, 가구도 없는 채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벨로루시 최대 나치 학살 현장의 행정 중심지
나치는 이후 추방자들을 일할 수 있는 '수용자'와 어떠한 혜택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로 구분했습니다. 늙고 병들고 허약한 이들은 총탄에, 혹은 굶주림과 추위에 죽어갔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목재와 식량 운송 작업에 동원되었습니다. 이 무렵 서유럽 유대인을 실은 열차가 민스크에 정기적으로 도착했고, 나치는 체계적인 말살을 위해 민스크 인근 마을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를 선택했습니다.
독일 가요가 흐르는 가운데 울려 퍼진 총성
그곳의 옛 칼 마르크스 집단농장은 벨로루시 보안경찰 지휘부의 소유지로 전환되었습니다. 식량과 생활 물자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나치는 수용자들을 장인과 농사일에 동원했고, 이 부지는 소련 영토 내 최대 학살 현장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인근 블라고프시나(Blagovschchina) 숲에서는 수만 명이 총살되었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은 총살대가 학살을 진행하는 동안 확성기가 흐르는 독일 가요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고 증언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싱어송라이터 비어만의 조부모도 '구덩이에서 총살'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의 조부모를 포함해 그의 친척 20여 명도 이런 방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외 없이" — 아마도 로젠베르크 가족과 같은 열차였을 것입니다 — "1941년 11월 무어바이데에서 민스크 게토로 추방된 뒤, 도시 숲에서 군인들의 총탄에 구덩이 속으로 쓰러졌습니다"라고 비어만은 'Welt'지 기고문에 적었습니다.
이동식 가스실로 쓰인 트럭
1942년 6월경부터 트로스테네츠의 나치들은 소위 '가스밴'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가구 운반 트럭과 다름없지만, 상자 모양의 밀폐된 차체를 지녔습니다. 시동이 걸리면 엔진의 배기가스가 호스를 통해 차실로 유입되었고, 한 번의 살인 행위로 최대 100명이 질식사했습니다. 시신은 블라고프시나의 죽음의 숲에 매장되었습니다. 하인츠 로젠베르크의 부모와 여동생도 가스밴에서 살해당했습니다.
특별작전반, 대량 학살의 흔적을 지우다
1943년 초, 붉은 군대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격파하자 점령군은 만행의 결과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말리 트로스테네츠의 대량 학살 은폐 작업이 개시된 것입니다. '특별작전반 1005(Sonderkommando 1005)' 작전에서 민스크의 수용자들은 갈고리로 구덩이에서 시신을 끌어올려 쌓아 올린 뒤 불태워야 했습니다. 이후 재를 뒤져 금니와 보석을 찾아냈습니다. 이 작업의 목격자를 남기지 않기 위해 '땅 정화'에 동원된 이들 역시 정기적으로 살해당했습니다.
민스크 게토 역시 해체되어 거의 모든 주민이 사망했고, 건물들은 폭파되었습니다. 함부르크 출신 하인츠 로젠베르크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러 강제 수용소를 전전했으며, 1945년 베르겐-벨젠 수용소가 해방될 때 영국군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헨리 로버트슨(Henry Robertson)'이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1997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