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히틀러의 비밀 로켓 공장을 무너뜨린 밤 — 1943년 페네뮌데 폭격 '히드라 작전'의 전말

by Henning Strüber, NDR.de

철저한 기밀 속에 진행된 이 작전은, 심지어 영국 조종사들조차 자신이 페네뮌데 상공에서 정확히 무엇을 폭격하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1943년 8월 17일에서 18일로 넘어가는 밤, 약 600대에 달하는 영국 왕립공군(RAF) 폭격기가 우제돔 섬 북쪽 끝 상공에 치명적인 짐을 쏟아부었습니다. 공격 목표는 페네뮌데(Peenemünde). 당시 이 고요한 어촌 마을에는 지난 몇 년간 나치 독일의 최대 규모 비밀 프로젝트 중 하나인 육군 연구소(HVA)와 공군 시험 센터 '페네뮌데-서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나치와 맺은 치명적인 거래

1936년부터 과학자들은 로켓 개발의 선구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의 지휘 아래 로켓의 군사적 활용을 연구해 왔습니다. 음악과 과학 양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 젊은 엔지니어는 언젠가 로켓으로 달에 도달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페네뮌데에서 폰 브라운은 연구에 사실상 무제한의 자금을 쏟아붓던 국가사회주의자들과 운명적인 거래를 맺고 맙니다.

괴물의 목을 잘라내라: 히드라 작전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 과학자들은 영국군 작전 코드네임 '히드라 작전(Operation Hydra)'의 핵심 표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괴물처럼, 잘려나갈 머리란 곧 나치의 로켓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영국이 두려워하던 신무기는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파괴해야 했습니다. 로켓의 위력은 실제로 어마어마했습니다. 1942년 페네뮌데에서 발사된 대형 로켓 '아그레가트 4(Aggregat 4)'는 인류 최초로 우주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나치 선전부는 훗날 이 로켓의 명칭을 '보복무기 2호(V2)'로 바꾸며, 연합군의 공습에 대한 응답이라는 '기적의 무기'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영국이 포착한 독일의 비밀 무기 정보

항공 정찰 사진 덕분에 영국은 마침내 페네뮌데의 비밀을 좇아냅니다.

1939년 이후 영국은 로켓이 한 축을 담당하는 독일 국방군의 군비 프로젝트에 관한 단서들을 포착해 왔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로켓 공장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기 전에, 영국군은 목표물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특정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서로 모순되는 보고가 너무 많았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보고서는 서랍 속에 먼지를 쌓았고, 일부 첩보는 독일의 위장 공작으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새로운 사진 분석 기술을 활용한 영국의 항공사진 해석관들이 페네뮌데를 의도한 목표물로 확정하면서, 공격의 길이 열렸습니다.

성공한 기만 작전

8월의 야간 임무는 순조롭게 출발했습니다. 첫 번째 기만 전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폭격기 편대는 전날 밤 이미 섬 상공을 비행했고, 지상에서는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폭격기들은 육군 연구소가 아니라 베를린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8월 17일 밤, 폭격기들이 다시 페네뮌데로 진로를 잡았을 때, 독일 요격기 대부분은 베를린 광역권 방면으로 출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페네뮌데의 HVA 직원들은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여겼고, 벙커로 신속히 대피하기는커녕 반복되는 허위 경보를 농담거리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운명을 바꾼 치명적인 착오

그러나 공격자에게도 실수는 있었습니다. 공격 시점을 결정짓던 보름달은 좋은 시야를 보장했지만, 얇은 구름과 지상의 연막 발생 장비는 소위 '패스파인더(Pathfinders)', 즉 목표 표지 부대의 항법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표지 부대는 실제 랜드마크인 우제돔 섬 북쪽의 루덴 섬(Ruden)과 페네뮌데 북단을 혼동했고, 이로 인해 공격 중심축은 남쪽으로 약 3km 밀려나게 됩니다.

핵심 과학자들은 죽고, 폰 브라운은 살아남다

1942년 페네뮌데에서 발사된 로켓이 처음으로 우주 경계를 관통했습니다.

연구·생산 시설뿐 아니라 과학자 숙소와 강제노동자 수용소도 폭탄 세례를 받았습니다. 페네뮌데 역사기술박물관(Historisch-technisches Museum Peenemünde)에 따르면 과학자, 지역 주민, 그리고 다수의 강제노동자 등 총 700여 명이 이번 공습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사망자 가운데는 엔진 개발 책임자 발터 틸(Walther Thiel), 개발 공장 운영 책임자 에리히 발터(Erich Walther) 등 로켓 프로그램의 핵심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설계 사무소 인근 벙커에 머물던 폰 브라운은 폭격을 살아남았습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작전의 성과는 제한적이었습니다. 'V2'의 개발은 이미 이 시점에 상당 부분 완료된 상태였고, 생산 계획 역시 외부로 이관된 직후였습니다. 실제로 공습 약 두 달 뒤인 10월 6일, 'V2'는 페네뮌데에서 다시 이륙했습니다.

강제노동으로 이어진 비극적 결과

페네뮌데 공습 이후, 나치는 생산 거점을 지하 터널로 이전하는 방안을 서두르게 됩니다.

인근 트라센하이데(Trassenheide) 수용소에서는 이 공습으로 약 5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더 광범위한 결과는 1943년 5월부터 운영된 칼스하겐 I·II(Karlshagen I/II) 수용소의 약 2,500명 강제노동자에게 닥쳤습니다. 'V2' 생산을 지하 공장으로 분산 이전하는 계획은 이미 수립되어 있었고, 즉각 실행에 옮겨집니다. 부품들은 열악하고 비인도적인 작업 환경이 지배하던 노르트하우젠(Nordhausen) 인근의 지하 공장 미텔바우도라(Mittelbau-Dora)로 옮겨졌습니다.

생산이 사용보다 많은 희생자를 낳다

분소 수용소와 지하 터널에서 진행된 'V2' 생산 과정에서 12,000명 이상이 사망합니다. 주로 런던과 안트베르펜을 향해 발사된 'V2'는 대부분 민간인인 8,000~12,000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요컨대 'V2'의 생산은 실전 사용보다 더 많은 목숨을 갈취한 셈입니다.

민간인을 공포에 떨게 한 '기적의 무기'

1943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약 3,200발의 'V2'가 실전 배치되었습니다. 역시 페네뮌데에서 개발된 비행폭탄 Fi-103('V1')과 달리, 전고 14m에 약 750kg의 폭발물을 실은 'V2'는 요격이나 조기경보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는 민간인들 사이에 큰 공포를 퍼뜨렸습니다. 그럼에도 독일군이 'V2'에 걸었던 기대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기적의 무기'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데 실패했습니다.

전후, 폰 브라운은 미국에서 계속 로켓을 만들다

로켓 연구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전쟁 후 NASA에서 근무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은 'V2' 로켓 기술을 손에 넣었습니다. 동서 냉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의 로켓 기술 노하우는 미국과 소련 양측 모두가 탐내는 자산이 되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1938년 나치당(NSDAP)에 입당하고 이후 SS 소령(SS-Sturmbannführer)에 올랐던—폰 브라운은 전후 NASA에 합류해 '달 로켓' 새턴 5(Saturn V) 개발을 주도하게 됩니다. 1969년, 이 로켓 연구자의 오랜 꿈은 인류 최초의 달 착륙으로 현실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