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군주제의 마지막 장은 1918년 11월 9일에 닫혔습니다. 이날 사회민주당(SPD) 소속 필립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이 공화국 선포를 선언하면서, 혁명의 도화선이 된 수병들의 봉기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글렌 하이제
'공해 함대는 가능한 한 빨리 영국 함대와 결전을 벌이라.' — 1918년 10월 24일, 독일 해군 사령부가 내린 명령이었습니다. 빌헬름스하펜에 주둔 중이던 제국 해군 함대는 10월 29일 출항하여 전쟁 내내 우세했던 영국 해군과 마지막 해전을 벌일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국 정부는 연합국과 휴전 협상을 진행 중이었고, 함대는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할 처지였습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있었다
패색은 이미 오래전부터 짙어져 있었습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프랑스와 벨기에 참호에 갇힌 독일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육군 사령부는 점점 더 전선을 후퇴시켜야 했습니다. 1918년 여름, 최고 사령부는 상황이 절망적임을 자각했고 9월 말에는 제국 정부에 휴전 협상을 요청했습니다. '승리의 평화'만을 외쳐 온 선전에 익숙했던 대중은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계 패권의 상징, 독일 함대
해군 장교들은 군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특히 독일의 자랑으로 여겨졌던 대함대는 전쟁의 결정적 순간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채 항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빌헬름 2세 황제와 대제독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는 영국 해군과의 의도적인 건함 경쟁을 통해 함대를 일궜는데, 이는 '태양 아래의 자리'를 추구하던 독일 제국의 세계 패권 야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곧 영국·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식민지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겠다는 포부였습니다.
자살 임무에 맞선 수병들의 반란
그러나 평범한 수병들은 장교들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 자살 임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빌헬름스하펜에 정박한 제1·제3전함분대에서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10월 29일 밤부터 30일로 넘어가는 동안 수병들은 보일러를 끄고 출항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해군 지휘부는 함대 출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닫고 승무원들을 배에 묶어두려 했으나, 10월 31일 반란을 주도한 수병들은 저항 없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빌헬름스하펜의 저항, 킬의 봉기로
군 당국은 체포된 수병들 일부를 빌헬름스하펜에 구금하고, 나머지 수병들과 화부(火夫)들을 킬로 이송했습니다. 이것이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로 판명됩니다. 킬에서는 함선 승무원들과 부두 노동자들이 억류된 동료들과 연대했고, 빌헬름스하펜의 불복종은 킬의 본격적인 봉기로 번졌습니다. 봉기에 나선 수병들은 곧 SPD와 USPD(독립사회민주당) 대표들과 접촉을 시도했으며, USPD 소속 로타르 포프(Lothar Popp)와 카를 아르텔트(Karl Artelt)가 이후 설립된 킬 노동자·군인 평의회의 지도부를 맡았습니다.
11월 3일 킬에서 열린 시위에 군 부대가 발포하면서 시위자 7명이 사망하고 29명이 다쳤습니다. 수병들이 총격을 받았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이틀 만에 북해 연안의 모든 해군 기지까지 전해졌습니다.
봉기를 진압하려던 제국 정부
베를린의 제국 정부는 초기 혁명을 무마하려 애썼습니다. 사회민주당 국회의원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가 국무장관 콘라트 호스만과 함께 킬로 파견되었습니다. 노동자와 군인들이 평의회를 구성한 가운데 그들은 사민당원인 노스케를 환영했고, 11월 5일 그를 킬 노동자·군인 평의회 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노스케는 사면을 약속하며 봉기 진압에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수도 베를린까지 번진 혁명
그러나 혁명의 불길은 이미 북쪽에서 제국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11월 7일 혁명의 물결은 뮌헨에 도달했고, 루트비히 3세는 바이에른 왕위에서 물러난 최초의 독일 군주가 되었습니다. 제국 수도 베를린에서도 상황은 임계점에 달해 있었습니다. 11월 9일, 막스 폰 바덴 총리는 빌헬름 2세의 동의 없이 황제의 퇴위를 발표했습니다.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1941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같은 날 오후, SPD 부대표 필립 샤이데만은 베를린 국회의사당 발코니에서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독일 혁명의 행로: SPD와 KPD의 분열
공산당의 공동 창당자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가 얼마 뒤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는 사실은, 1918년 11월 이후 독일 혁명이 나아갈 방향을 이미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평등·자유선거 실시와 공화국의 기반 마련이라는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총리와 다수파 사민당은 구 제국 지지 계층과의 균형을 추구했고, 평화와 질서 회복이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습니다.
피로 끝난 스파르타쿠스 봉기
공산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를 원했고,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 과정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이끈 독립사회민주당 좌파와 KPD(독일공산당)의 급진 세력은 소련 모델에 따라 혁명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시도는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라는 이름으로 유혈 진압되었습니다. 당시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구스타프 노스케는 소요 진압을 위해 일부 반동적인 자유군단과 손을 잡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자유군단 병사들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무거운 유산을 안은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생 공화국은 태생적으로 무거운 짐을 짊어졌습니다. 깊이 분열된 사회와 커다란 내부 모순을 제국으로부터 물려받았고, 좌우 양측의 많은 세력이 공화국에 적대적이었습니다. 수병들의 봉기는 반동 정치세력에게 '등 뒤에서 찌른다'는 비방의 신화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독일은 아직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훗날 이 신화를 인용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의 재무장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합니다.
스커퍼 플로우에 가라앉은 독일 함대
독일 제국의 자랑이었던 대함대는 불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오크니 제도 스커퍼 플로우(Scapa Flow) 만에 영국 해군에 의해 억류되어 있던 함대는 1919년 6월, 자체 침몰로 해저에 가라앉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