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베르사유 조약 Q&A: 독일은 왜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했을까?

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에 체결되어 1920년 1월 10일에 발효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영토를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소위 '전쟁 책임'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볼프강 뮐러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그 여파를 고스란히 느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던 날,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이미 많은 청중 앞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대표단을 데려오라"고 외쳤습니다. 독일 대표들은 얼굴이 부서지고 훼손된 다섯 명의 전쟁 상이군인 앞을 지나야 했습니다. 마치 "당신들이 저지른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거대한 탁자에 이르러 조약문에 서명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베르사유 조약에는 당시 외무장관에 새로 임명된 헤르만 뮐러와 내각 동료들이 서명했습니다. 장소는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 바로 수십 년 전, 프랑스에 대한 승리 이후 독일 황제의 선언과 함께 1871년 제국이 건국되었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독일 내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거부되었는데, 왜 서명했는가?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명하지 않았다면 독일은 연합군에 의해 점령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와 달리,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시점에는 적군이 아직 독일 본토를 침공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침공은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었고,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같은 독일 군부 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점은, 이들이 훗날 상황을 다르게 그려내며 독일이 당시 불렸던 대로 '현장에서 무패'였다는 소위 '배후중상설(뒷전설)'을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독일은 분명 패배했고, 따라서 독일인들은 아무리 가혹한 조건이라 해도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본 것은 정치적 우파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회민주당의 필립 샤이데만조차 몇 주 전에 조약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서명하는 사람은 누구든 손에 흙을 묻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서명해야 했던 헤르만 뮐러 또한 사회민주당 출신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우선 이 조약으로 독일은 영토의 약 7분의 1을 상실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상당히 부유한 지역이었는데, 무엇보다 폴란드가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컸습니다(이웃 국가들은 100년 넘게 폴란드를 분할해 왔습니다). 서쪽으로는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반환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금 의무였고, 예컨대 독일 상선 함대의 거의 전부를 인도해야 했습니다.

악명 높은 '전쟁 책임' 조항은 어떻게 된 일인가?

독일은 실제로 세계대전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 주제만으로 책장 전체를 채운 책들이 쓰여졌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2차 세계대전(명백히 독일이 시작했다)과 달리 1914년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이 유일한 책임자로 지목된 것은 큰 불의로 여겨졌고, 책임은 반대 진영 일부에도 있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점은, 20세기의 평화협정은 100년 전의 평화협정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1815년 나폴레옹 격퇴 이후 빈 회의에서는 패전국 프랑스도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독일은 사실상 완성된 조약을 통보받은 셈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예전처럼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각기 다른 기대와 열기에 들뜬 대중이 협상 테이블 주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론의 압력은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해법을 찾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어떤 의미였는가?

바이마르 공화국은 단순히 패배 위에서가 아니라 굴욕감 위에서 탄생한 공화국이었습니다. 정치권은 이 주제를 끝없이 들추었고, 조약 이행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은 '이행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썼으며, 일부는 암살되기까지 했습니다.

배상금이 가져온 경제적 부담 역시 뚜렷하게 남았습니다. 당시 젊은 경제학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훗날 세계적 석학이 됨)는 이를 정확히 예견하고 항의하며 영국 대표단을 떠났습니다. 그의 경고는 이랬습니다. 독일은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안정될 수 없으며, 결국 다른 나라들까지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고 말 것이라고.

그럼에도 베르사유 조약 속에서도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만 그 기회를 붙잡고 지켜낼 강력한 민주 세력이 필요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세력은 너무 작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