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카트린 베버(Kathrin Weber), NDR.de
[이미지 설명] 브라운슈바이크 주립박물관에 소장된 그림 속, 구엘프 황제 오토 4세의 초상화 세부.
1175년 또는 1176년,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Otto von Braunschweig)는 '사자 헨리(Henry the Lion)'와 잉글랜드 왕녀 마틸데(Mathilde)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생은 당시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인 벨프 공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판에 회부되었기 때문입니다.
1180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iedrich Barbarossa) 황제는 사자 헨리에게 제국 금지령을 내렸고, 가족은 잉글랜드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토는 자녀가 없는 외삼촌 '사자심왕' 리처드의 보호 아래에서 격식과 교양을 갖춘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가족이 브라운슈바이크로 돌아온 뒤에도 오토만은 잉글랜드에 남았습니다.
사자심왕 리처드가 품은 원대한 청사진
리처드 왕은 조카를 위해 큰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오토에게 요크셔 백작령을 넘겨주고 권력 정치적으로 유리한 혼인까지 주선하려 했습니다.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신 프랑스의 푸아투 백작령을 위임하고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했습니다. 오토는 삼촌과 함께 군 지휘관으로서 프랑스에 맞서 싸웠습니다.
1198년 이중 선거: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
1197년 독일왕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면서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촉발되었습니다. 독일 제후의 다수는 슈타우펜 가문의 필립(Philipp)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쾰른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은 이 결정을 거부하고 대립왕을 지명했습니다. 왕관은 1198년 7월 아헨에서 즉위한 오토에게 돌아갔습니다.
대관식으로 마무리된 권력 다툼
두 왕 중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교황의 신임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오토와 필립은 수년간 왕위를 놓고 격돌했고, 1206년에는 필립이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합니다. 1208년 필립이 암살되면서 오토 앞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1209년 10월 4일, 교황 인노센트 3세는 로마에서 그를 독일 황제로 대관했습니다.
[이미지 설명] 금색 자수가 놓인 보라색 실크 — 오토 4세가 착용했던 황실 의복의 모습.
교황과의 결렬, 그리고 파문
그러나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오토가 시칠리아 정복을 시도하면서 교황의 강경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갈등은 1210년 11월 오토의 파문으로 절정에 달했고, 1214년 그의 군사적 패배로 막을 내렸습니다.
몰락과 최후: 브라운슈바이크로의 귀환
1215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오토의 영향력은 북독일의 고향 유산인 브라운슈바이크와 하르츠 산맥의 성들로 축소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물러나 지냈습니다. 1218년 오토는 하르츠부르크(Harzburg)에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오늘날 대성당으로 남아 있는 성 블라시우스 대학교회(Collegiate Church of St. Blasii)에 안장되었습니다. 오토의 부모와 첫 번째 아내 베아트릭스(Beatrix)의 무덤 역시 사자 헨리가 세운 이 교회에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오토 4세는 독일 제국의 왕좌에 오른 유일한 벨프(구엘프) 가문의 황제로서 오늘날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