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운명을 마무리한 산타페 협상은 단순히 레콩키스타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는데, 바로 산타페 항복(Capitulaciones de Santa Fe), 즉 1492년 4월 17일 가톨릭 군주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쪽 항로를 통해 인도에 도달하기로 합의한 조건들이 확립된 사건입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에 이어 전례 없는 발견과 식민지화 사업의 선구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다만 카스티야가 대서양 방면으로 나아가는 데 시간이 걸린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귀족 간 경쟁과 왕실 권위주의가 낳은 15세기 카스티야의 정치적 불안정이 있었고, 둘째는 정복 사업의 연장과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십자군 정신이었습니다. 여기에 이사벨 여왕의 알카소바스-톨레도 협정 준수 의무, 그리고 이미 해협 지역에서 긴장과 갈등을 일으켜 온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주도권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라팔마 정복(1492~1493)과 테네리페 정복(1494~1496)을 통해 카나리아 제도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습니다. 이 섬들은 이후 신세계로 향하는 항해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기항지가 되었습니다.
교황 교서로 대표되는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간의 정치적 경쟁은 비기독교 영토에 대한 서유럽 국가의 확장 권리와 우선권을 규정했습니다. 1492년까지 로마 교황청은 포르투갈을 지지하는 일련의 교서를 승인했습니다(Romanus Pontifex, 1455년; Inter Caetera, 1456년; Aeterni Regis, 1481년). 이를 통해 포르투갈 왕국은 정신적·현세적 특권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확장 과정의 합법성과 독점권을 확보했습니다. 한편 알카소바스 조약의 체결은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수정될 영토 분할안을 승인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새로운 땅의 발견이 알려지자 교황은 면제권·권한·기부 등의 측면에서 카스티야에 유리한 권리를 적용했습니다.
콜럼버스의 4차 항해(1492~1504)를 통해 발견, 즉 문명 간의 만남과 식민지화, 탐험, 그리고 최초의 상업적 접촉이라는 초기 과제들이 실현 가능해졌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발견 사업이 민간 주도로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실은 '정복 항복(capitulación)'이라 불리는, 개인에게 특정 영토의 정복을 시작할 수 있는 허가증을 부여하는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초기 미주 문제의 조직은 로드리고 데 폰세카(Rodríguez de Fonseca)와 로페 데 콘칠요스(Lope de Cochinillos)가 이끄는 소규모 페르난디노 관료 집단이 담당했습니다. 1503년에는 신세계와의 상업 관계를 중앙 집중화하기 위해 세비야에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Casa de Contratación, 세비야 상관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16세기 내내 세비야는 인구가 빽빽한 대도시로 성장했고, 카스티야 대외 무역의 중추로 자리 잡았습니다. 세비야 항구는 아프리카·지중해·대서양이 삼중으로 만나는 국제 교차로의 축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인 1513년, 폰세 데 레온은 머나먼 플로리다 땅에 도달했고,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는 태평양으로 통하는 남해(Sur)를 발견했습니다.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신대륙 아메리카는 이렇게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