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원정은 혁명 프랑스에 적대를 이어가던 유일한 강국인 영국과의 대결의 일환으로, 1798년부터 1800년까지 보나파르트 장군이 주도한 동방 군사 원정이다. 1798년 총재정부로부터 이집트 원정의 지휘를 위임받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하며 이집트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그는 맘루크의 억압으로부터 백성을 구원하는 해방자로 등장했고, 원정에 동행한 학자들은 이집트의 잊혀진 과거를 다시 발굴해냈다. 그러나 넬슨 제독이 아부키르에서 프랑스 함대를 궤멸시켰고, 보나파르트가 떠난 뒤 프랑스군은 1801년 이집트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이집트 원정의 배경
이집트 원정은 총재정부(Directoire) 시기에 결정되었다. 행정권을 장악한 총재들은 자코뱅파와 왕당파의 위협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에 의존했고, 이미 이탈리아 원정에서 화려한 승전을 거둔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주목했다. 원정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총재정부 입장에서 지나치게 야심차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보나파르트를 파리에서 멀리 보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영국의 상업적 패권을 직접적으로 저해하는 것이었다.
이 원정이 가져다줄 이점은 분명했다. 수에즈 지협을 차단해 영국이 아시아로 향하는 경로 중 하나를 끊고, 영국 부의 근원인 인도 침공을 준비하며, 나아가 프랑스가 상실한 식민지를 대체할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물론 원정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랐다. 유럽에서 전쟁이 재개될 조짐이 있는 상황에서 정예 군대를 먼 이역에 묶어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술탄의 통제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던 이집트의 저항은 미약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 이후 보나파르트는 총재정부를 타도할 역량까지 갖춘 상태였다. 총재정부는 인기를 잃어 쿠데타의 여지가 있었지만, 여전히 합법 정부라는 점에서 성공은 보장되지 않았다. 보나파르트는 잊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빛나는 업적을 쌓아야 했다. 1797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학자로서의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호슈(Hoche)의 영국 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뒤, 남은 선택지는 탈레랑이 제안한 이집트 원정이었다.
공식 명분은 '학술 탐사'
1798년 5월 19일, 200여 척의 선단이 35,000명의 병력을 싣고 툴롱항을 출발했다. 영국 함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원정은 철저히 비밀리에 준비되었으며, 공식적인 명분은 학술 탐사였다. 광물학자 돌로미외, 식물화가 앙리조제프 르두테, 수학자 가스파르 몽주, 화학자 클로드 베르톨레, 비방 드농 등 과학·예술위원회 소속의 167명에 달하는 학자, 기술자, 예술가들이 원정에 동행했다. 이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임무를 지닌 '이집트 연구소(Institut d'Égypte)'를 설립했고, 이를 위해 학술지 『이집트 10년(La Décade Égyptienne)』까지 창간되었다.
발굴 조사 과정에서 히에로그리프(신관문자), 데모틱(민중문자), 그리스어 세 종류의 비문이 새겨진 로제타석이 발견되었다. 이 석비는 훗날 샹폴리옹이 문자를 해독하면서 이집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보나파르트의 진짜 의도는 동방에서 추가적인 영광을 쟁취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한쪽 눈으로는 파리 정국의 변화를 살피고 있었다.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정복
프랑스군은 1798년 7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인근에 상륙했다. 같은 달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카이로로 가는 길이 열렸다.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 만에서 영국 함대에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집트 통치 개편에 착수했다. 그는 7인으로 구성된 통치 기구를 세우고 세제를 정비하며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했고, 인구 조사도 실시했다.
그러나 1798년 10월 카이로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뒤퓌(Dupuy) 장군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집트의 유력자들 상당수는 프랑스군에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한 물자 부족과 물가 폭등 속에서 일반 민중은 점령 통치에 계속 적대적이었다.
보나파르트는 1799년 4월 다보르 산 전투에서 튀르크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포병 화력의 부족이 발목을 잡았고 군대에 페스트마저 번지면서 그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튀르크군의 이집트 상륙 위협이 현실화되자, 보나파르트는 1799년 7월 25일 아부키르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대파했다. 이 승리는 앞선 패배의 굴욕을 씻어내는 의미 있는 성과였다.
보나파르트의 귀국과 원정의 종말
프랑스가 동방에 원정을 감행하고 국경 지대에 새로운 위성 국가들을 세우자, 유럽 열강은 프랑스의 세력이 위험할 정도로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러한 위협감 속에서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나폴리로 구성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동맹군은 30만을 넘는 병력을 동원했고, 이에 맞선 프랑스군은 15만에 불과했으며 최정예 부대는 이집트에 발이 묶여 있었다.
유럽의 새로운 위기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집트에서 돌려놓았다. 그 결과, 보나파르트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었던 '먼 거리'가 순식간에 정치적 약점으로 돌변했다. 1799년 8월 23일, 그는 이집트군의 지휘권을 클레베르(Kléber)에게 넘기고 프랑스로 향했다.
지중해에서 영국 함대를 교묘히 따돌린 보나파르트의 귀국 소식은 그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파리에 먼저 전해졌고, 그를 '패배한 장군'으로 몰아붙이던 비관적인 소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프랑스를 지켜낸 전쟁 영웅의 이미지를 얻었고, 귀국길 곳곳에서 환호를 받았다.
열렬한 선전에 힘입은 위광을 두른 보나파르트는 마침내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799년 11월 9일)로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한다. 당시 원정군에 배포되던 군용 신문 『이집트 특파원(Courrier d'Égypte)』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선전 도구로 기능했다. 2년 뒤인 1801년, 이집트에 남겨진 프랑스군의 생존자들은 영국과 항복 협정을 맺고, 잔류하던 학자들과 함께 본국으로 송환될 수 있었다.
이집트 원정은 비록 군사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새로운 학문인 이집트학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 나아가 고고학이 단순한 보물 사냥을 넘어, 문명에 대한 이해와 유적 연구라는 학문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원정이기도 했다.
참고 문헌
- Jacques-Olivier Boudon, 『La Campagne d'Égypte』, Belin, 2018.
- Catherine Chadefaud, 『Bonaparte et la campagne d'Égypte』, Ellipses,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