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태평양을 발견한 스페인의 탐험가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는 태평양을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발견한 스페인의 항해사이자 탐험가입니다. 16세기 초에는 이미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인도가 아니라, 대서양을 통해 인도에 도달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수많은 탐험가와 모험가들이 신대륙을 우회할 수 있는 항로를 찾거나 그 땅에 숨겨진 보물을 노리며 바다로 나섰습니다.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는 파나마 지협을 최초로 횡단한 인물 중 한 명으로, 1513년 태평양을 발견하고 이를 '남해(South Sea)'라고 명명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당시 정복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땅, 작위, 아메리카의 부에 대한 치열한 권력 다툼과 음모의 주인공이자 희생자이기도 했습니다.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연대기

1475년 – 스페인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Jerez de los Caballeros)에서 출생
1501년 – 바스티다스의 배에 승선하여 신대륙으로 향함
1510년 – 다리엔(Darién)에 산타 마리아 데 라 안티구아 도시 건설
1513년 – 태평양 발견
1514년 – 남해(태평양)의 총독(아델란타도)으로 임명됨
1517년 – 아클라(Acla, 오늘날 파나마)에서 처형됨

출생과 젊은 시절

발보아의 아버지 Ñuño Arias de Balboa는 갈리시아 출신의 이달고(hidalgo)로, 몰락한 귀문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바다호스 주) 출신의 여인이었으며,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는 1475년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에스트레마두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모구에르(Moguer)의 영주였던 페드로 데 포르토카레로(Pedro de Portocarrero) 밑에서 시종으로 들어갔습니다.

10대 시절, 그는 인근 팔로스(Palos) 항구에서 벌어지던 콜럼버스의 항해 준비 상황을 지켜보았고, 이후 온 웨우바(Huelva) 지방을 뒤흔든 모험과 정복의 열풍 속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1501년에야 실현됩니다. 1525년 산타 마르타를 건설하게 될 선장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Rodrigo de Bastidas)가 그를 신대륙 항해 선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태평양을 발견한 스페인의 탐험가

바스티다스 원정과 도피 항해

바스티다스의 원정대는 콜롬비아 카리브해 연안을 따라 항해했습니다. 마그달레나 강 하구, 산타 마르타 만, 우리아바 만(다리엔), 그리고 파나마 지협까지 닿았습니다. 항해가 끝난 후 발보아는 히스파니올라(산토도밍고)에 남았고, 그곳에서 발견자 콜럼버스의 아들이자 부왕이었던 디에고 콜론(Diego Colón)의 총애를 얻게 됩니다.

당시 이미 유명했던 정복자 알론소 데 오헤다(Alonso de Ojeda)가 다리엔 동쪽의 새 식민지 '카스티야 델 오로(Castilla del Oro)'의 통치를 맡기 위해 출항했고, 그의 동료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Martín Fernández de Enciso)는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싣고 뒤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빚을 진 바스코 누녜스는 채권자들을 피해 엔시소의 배에 밀항자로 숨어들었습니다. 곧 발각되었지만, 목적지 해역과 연안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던 그는 선장에게 조타수로 받아들여집니다.

산타 마리아 데 라 안티구아 건설

한편 오헤다는 원주민들의 공격에 시달려 무기와 증원군을 구하러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엔시소와 발보아는 나중에 페루 정복자가 되는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지휘하던 산 세바스티안 요새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저항은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용기와 리더십으로 명성을 얻은 바스코 누녜스는 만 반대편, 원주민들이 더 우호적인 해안으로 거점을 옮길 것을 제안합니다. 엔시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병사들이 발보아를 따랐습니다.

1510년 발보아는 새로운 위치에 산타 마리아 데 라 안티구아(Santa María de la Antigua)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영구 정착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해안이 오헤다의 관할이 아니라 누에바 안달루시아(Nueva Andalucía)에 속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총독 디에고 데 니케사(Diego de Nicuesa)는 침입자들을 공격했지만 패배하여 전복된 배에 버려졌고, 엔시소는 다리엔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쪽의 광활한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11년, 부왕 콜론은 왕실의 임명을 통해 발보아를 다리엔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발보아는 안티구아에 자신의 오랜 동료들과 다른 정복 전쟁의 참전 용사들을 소집하여 파나마 지협으로 진격했고, 원주민들과 싸우거나 협상했습니다. 그는 카레타족의 추장 치마(Chima)와 협약을 맺었고, 추장은 맹세의 증표로 자신의 딸을 그에게 주었으며 발보아도 이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폰카(Ponca)와 코모그레(Comogre) 추장들과 교류하던 중, 그는 "남쪽에 황금의 땅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바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1513년 9월 1일, 발보아는 스페인인 190명과 원주민 8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산맥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3주 넘게 힘겨운 행군을 계속한 끝에 9월 25일, 드디어 광활한 바다를 목격합니다. 그는 이 바다를 '남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자신이 남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발견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리적 성취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태평양을 발견한 스페인의 탐험가

영광과 비극적 최후

놀라운 발견 소식은 새 총독 페드라리아스 다빌라(Pedrarias Dávila)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는 엔시소의 항의와 니케사의 죽음에 대한 고발, 그리고 후원자 디에고 데 콜론의 입지 약화로 발보아를 대신해 부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발견의 부인할 수 없는 중요성 때문에 1514년 국왕은 발보아를 남해의 총독이자 파나마와 코히바(Cohiba)의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페드라리아스의 지휘 아래 두었습니다.

두 총독 사이의 관계는 극도로 긴장 상태였고, 발보아는 스페인에 살던 다빌라의 딸과 대리 결혼을 수락하며 화해를 시도합니다. 새로운 바다의 연안을 탐험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아클라(Acla) 마을을 재건하고 함선을 건조하기 위해 해안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새 총독 로페 데 소사(Lope de Sosa)의 부임 소식이 전해집니다. 의무적으로 실시되는 '재판소 심사(residencia)'에서 장모를 위해 증언하기 위해 발보아는 아클라에 머무르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다빌라는 발보아의 증언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왕실에 대한 반역죄로 체포합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발보아는 1517년 아클라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태평양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는 자신이 개척한 땅에서 음모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