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체리뇰라 전투(1503년 4월 28일): 스페인 패권 시대를 연 화승총과 보병의 승리

체리뇰라 전투 — "저들은 죽고, 우리가 이길 것이다"

"저들은 죽고, 우리가 이길 것이다."

체리뇰라 전투는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패배하기까지 약 140년간 스페인이 유럽 전장에 확립해 온 군사적 패권의 출발점이 된 전투다. '대장군'으로 불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프랑스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히며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체리뇰라 전투(1503년 4월 28일): 스페인 패권 시대를 연 화승총과 보병의 승리

체리뇰라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령관 네무르 공작의 시신을 바라보는 대장군

이탈리아 전쟁과 전운

'대(大) 이탈리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탈리아 전쟁은 1494년부터 1559년까지 벌어진 일련의 분쟁으로, 서유럽의 주요 강국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얽혔던 거대한 전쟁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비롯해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 도시 국가들, 심지어 오스만 제국까지 참여했다.

전쟁의 발단은 밀라노 공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프랑스의 상속 권리를 둘러싼 왕조 간 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빠르게 영토와 패권을 다투는 힘겨루기로 변질되었고, 동맹과 배동맹, 끊임없는 배신이 난무하는 극도로 복잡한 정세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라나다 조약의 파기와 바르레타 포위

나폴리 왕국을 스페인과 프랑스가 분할하기로 한 그라나다 조약을 프랑스가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1502년 네무르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대장군의 부대를 후퇴시켜 바르레타 시로 몰아넣었다. 원군을 기다리던 동안 스페인군은 그라나다 전쟁에서 익힌 기법을 활용해 밤습격과 매복 작전을 감행했고, 이런 방식의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크게 곤욕을 치렀다.

포위 기간에는 양군 기사들 간의 특별한 결투도 열렸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1502년 9월 21일에 열린 '바르레타 결투'였다. 프랑스 기사 11명과 스페인 기사 11명이 6시간 넘게 맞붙었고, 그 결과는 스페인 쪽에 크게 유리했다. 프랑스 측은 기사 1명이 전사하고 1명이 항복하며 9명이 부상당한 반면, 스페인 측은 항복 1명과 부상 2명에 그쳤다.

체리뇰라 전투(1503년 4월 28일): 스페인 패권 시대를 연 화승총과 보병의 승리

옛 나폴리 왕국의 지도

오트란토 해전에서 후안 데 레스카노 제독의 스페인 함대가 프리앙 제독의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자, 대장군은 드디어 독일 란츠크넥트 용병들로 전력을 보강할 수 있었고, 1503년 봄 공세를 개시했다.

기병에게 걸터앉은 보병 — 전례 없는 강행군

최대한 신속하게 진격하기 위해 대장군은 말 뒷짐에 보병 한 명씩을 태워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당시의 명예 관념에서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격렬한 항의가 빗발쳤지만, 대장군은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며 불만을 즉시 잠재웠다. 이 전례 없는 조치 덕분에 스페인군은 체리뇰라 마을에 미리 도착해 임박한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대장군은 참호를 파게 하고, 파낸 흙으로 성벽 같은 방책을 쌓은 뒤 그 위에 날카로운 말뚝을 박아 적 기병을 무력화하도록 했다. 체리뇰라는 언덕 위에 자리한 마을로, 비탈면에는 포도밭이 많았고 그 끝에는 계곡이 있었다. 대장군은 이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계곡을 넓혀 가장자리를 높여 참호를 만들었으며, 여기에 말뚝과 철포를 설치해 적 기병의 돌파를 차단했다.

양측의 전력과 배치

스페인군은 주로 보병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아르케부스(화승총) 총병, 석궁병, 흉갑창병(코세레테), 장창병이 그 핵심이었다. 기병은 다른 군대에 비해 눈에 띄게 부족했으며 경기병과 중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 13문은 참호와 비탈 뒤쪽의 작은 언덕 위에 배치되었다.

  • 아르케부스 총병 약 500명씩 두 집단 — 파낙 도랑을 따른 비탈 뒤와 도랑 앞쪽 참호에 최전선 배치
  • 독일 장창병 약 2,500명 — 중앙에 집결
  • 흉갑창병·석궁병 약 2,000명씩 두 집단 — 장창병 좌우에 배치
  • 중기병 약 400명씩 두 집단 — 프로스페로 콜론나와 페드로 데 멘도사의 지휘 아래 흉갑창병 뒤 양익에 배치
  • 경기병 850명 — 파브리치오 콜론나와 페드로 데 파스가 지휘하며 포대가 있는 언덕에 배치, 대장군 직속 예비대로 운용

경기병의 임무는 만에 하나 프랑스군이 방어선을 돌파하고 비탈을 넘어올 경우, 스페인 보병이 압도당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결국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마주했음에도, 체리뇰라 고지를 점거하고 목책·참호·말뚝으로 병사들을 요새화하는 등 꼼꼼한 사전 준비를 통해 수많은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포병 배치 역시 프랑스군보다 유리했다.

체리뇰라 전투(1503년 4월 28일): 스페인 패권 시대를 연 화승총과 보병의 승리

대오를 이룬 스페인 테르시오

프랑스군은 여전히 거의 봉건적인 전투 개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중기병 돌격이 절대적이었고, 스위스 용병 등 다수의 용병을 운용했으나, 동시에 스페인군보다 포병 전력이 더 컸다. 이 역설적인 구조는 16세기 전반 내내 프랑스군의 상수(常數)가 되었다.

네무르 공작이 지휘한 프랑스군은 네 개의 대형으로 편성되었다. 최전위에는 각각 약 1,000명씩 두 집단으로 나뉜 중기병이 위치했고, 공작 본인이 직접 지휘했다. 그 뒤에는 샤디외가 지휘하는 스위스 용병 장창병 3,000명이, 그 다음에는 가스콘 보병 3,000명이 대열을 이루었다. 보병 선두에는 프랑스군이 보유한 26문의 포가 배치되었고, 최후미에는 이브 달레그르가 지휘하는 경기병이 대군 진행 방향의 좌익을 향해 대기했다.

"저들은 죽고, 우리가 이길 것이다"

프랑스군이 체리뇰라 인근에 도착했을 때, 대장군은 적의 압도적 물량을 보고 가르시아 데 파레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오늘 우리는 승리하거나, 아니면 좋은 병사답게 전장에 시체로 남을 것이다. 좋은 죽음은 삶을 빛내니까." 이에 에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삼손', 즉 디에고 가르시아 데 파레데스가 답했다. "저들은 죽고,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네무르 공작은 자신의 정예 기병과 보병의 무자비한 충돌만으로 스페인 진지를 문자 그대로 쓸어버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반면 대장군은 지형 활용과 아르케부스 총병 운용에 특별한 무게를 둔 전혀 다른 전술을 준비해 두었다.

체리뇰라 전투(1503년 4월 28일): 스페인 패권 시대를 연 화승총과 보병의 승리

가렐라노강 다리에서 프랑스군을 분쇄하는 디에고 가르시아 데 파레데스

전투의 경과 — 단 한 시간의 결전

이 전투에서 가장 놀라운 특징 중 하나는 극도로 빠른 전개였다. 프랑스군의 첫 돌격에서 항복까지 불과 한 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 기병 돌격에 대한 열망을 알아차린 대장군은 기지를 발휘했다. 적에게 먼저 돌격을 유도한 뒤 프랑스 기병을 포병과 아르케부스 총병의 사정권 안으로 끌어들여, 최소한의 피해로 처음부터 최대한의 타격을 입히겠다는 작전이었다. 해 질 녘이 되자 스페인 기병이 들판으로 나와 프랑스군에 대한 돌격을 가장했다.

짧은 교전 후 스페인 기병은 후퇴하는 척했고, 프랑스 중기병은 이를 추격했다. 그러다 도랑과 방책에 다다랐을 때, 프랑스군은 예상치 못하게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아르케부스 총병 전위와 마주쳤다. 총병들이 즉시 사격을 개시했고 포병도 함께 화망을 퍼부었다. 이에 프랑스 기병은 순간 후퇴한 뒤, 스페인 우익 방책의 진입로를 찾아 비탈을 따라 왼쪽으로 평행하게 기동했다. 그러나 이 기동 중 프랑스 기병은 스페인 총병의 화망에 갈려나갔고, 네무르 공작 본인도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윽고 프랑스 육군 전체가 전투에 투입되었다. 포병이 보병 선두에 배치되었고, 남은 세 개 대형은 스페인군을 보호하는 도랑과 방책에 대해 사선(斜線)으로 배열되었다.

전투 한복판에서 뜻밖의 사고가 벌어졌다. 스페인 포병대의 화약이 우연히 폭발하면서 포병 전력이 통째로 무력화된 것이다. 대장군은 자신의 포병이 초토화되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즉시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기운 내라! 저것이야말로 승리의 불빛이다! 요새화된 진지에서는 포는 필요 없다!"

이후 프랑스 보병이 스페인군과 교전에 들어갔으나, 아르케부스 총병의 끊임없는 사격 앞에 갈려나갔다. 스위스 장창병의 지휘관 샤디외마저 전사했다. 프랑스 보병이 너무 가까이 접근해 총병에게 위험이 커지자, 대장군은 총병에게 후퇴를 명령하는 동시에 독일 장창병에게 전진을 명령했고, 장창병들은 스위스인과 가스콘인과의 백병전 끝에 마침내 그들을 격퇴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이 완패의 기미를 보이자, 대장군은 전군에게 방어 진지를 이탈해 공세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다. 프랑스 보병은 석궁병, 아르케부스 총병, 흉갑창병, 스페인 중기병의 포위망 속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 경기병은 이브 달레그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경기병에게 돌격해 이들을 도주시켰고, 이어서 프랑스 보병에게도 공격을 가했다. 혹독한 타격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군은 결국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 아르케부스 총병들은 총 약 4,000발을 발사했다.

체리뇰라 전투(1503년 4월 28일): 스페인 패권 시대를 연 화승총과 보병의 승리

격전 중인 스페인 테르시오

역사적 의의 — 보병 시대의 개막

체리뇰라에서의 프랑스군 패배는, 일주일 전 칼라브리아에서 페르난도 데 안드라데와 우고 데 카르도나가 지휘하는 스페인군이 도비니의 프랑스군을 세미나라 전투에서 격파한 승리와 더불어 나폴리 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순간부터 전쟁의 주도권은 스페인군의 손에 넘어갔고, 프랑스군은 북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군사사적 관점에서 이 전투는 전술의 혁명이었으며, 근대 전쟁의 토대 일부를 마련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아르케부스로 무장한 보병이 야외 전장에서 기병을 정면으로 격파한 것이다. 대장군은 화기를 활용해 프랑스 기병의 돌격을 고착시키고 무너뜨린 뒤 역습으로 이어지는 '억제-반격' 체계를 적용했고, 전장의 지형 선택과 사전 정비라는 요소까지 더했다. 또한 소규모 독립 부대로 구성된 군대가 대규모 블록 단위로 집결한 군대, 즉 이날 네무르 공작이 이끌었던 방식의 군대보다 기동성에서 결정적 우위를 지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때까지 스페인군은 다른 유럽 열강의 군대처럼 레콩키스타 전쟁의 유산인 기병 대량 운용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대장군이 창설한 '코로넬리아(coronelía)'라 불리는 새로운 보병 부대는 실전에서 그 탁월한 효능을 입증했고, 이후 수십 년간 세계를 제패한 유명한 스페인 테르시오(Tercios)의 씨앗이 되었다.

체리뇰라는 보병 시대의 개막을 알린 전투였다. 보병은 이후 4세기 이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유럽 어느 군대에서든 가장 지배적인 전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전투 개요

일자1503년 4월 28일
장소이탈리아 체리뇰라(풀리아)
좌표북위 41°16′00″, 동경 15°54′00″
결과스페인의 결정적 승리
교전 세력
프랑스 왕국에스파냐 군주국(히스패닉 군주국)
지휘관
루이 다르마냑(네무르 공작) †
샤디외 †
이브 달레그르
대장군(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프로스페로 콜론나
디에고 데 멘도사
파브리치오 콜론나
병력
경보병 3,000
장창병 3,000
경기병 1,500
중기병 2,000
포 26문
합계 9,500명, 포 26문
경보병 2,000
석궁병 2,000
장창병 2,500
경기병 850
중기병 800
아르케부스 총병 1,000
포 13문
합계 9,150명, 포 13문
손실
3,000~4,000명100~1,0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