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전역의 코사크 부대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시기 러시아 군대의 독특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대가 있다면, 단연 코사크 기병대다.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의 초원 지대에서 온 이 비정규 기병은 타타르, 슬라브, 심지어 폴란드계까지 다양한 기원을 가진 이질적인 집단으로, 14세기 드미트리 돈스코이와 함께 킵차크 한국(초원의 제국)에 맞서 싸운 이래 러시아와 협력해 왔다. 하지만 이 관계는 순탄치 않았고, 코사크(카자크)의 독립적인 성향은 그들이 가담한 여러 봉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전역의 코사크 부대 (1812년)

제도권 군대로의 편입과 1812년 동원령

18세기 내내 러시아 정부는 이들의 방종한 기질을 다스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고, 19세기 초가 되자 코사크는 완전히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공동체보다 인구 비례적으로 더 많은 병력을 군에 제공했으며, 3~4미터 길이의 긴 창, 각종 백병전 무기(사브르, 시미터, 전투 도끼), 화기(카빈총과 권총, 보통 2정에서 최대 6정까지) 등 장비까지 자비로 마련해 전력에 보탰다.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돈 호스트(보이스코)는 총 90개 폴크(연대, 각각 5~10개 소트니아 또는 중대로 구성, 중대당 100명)와 2개 마포병대대를 조직했다. 흑해와 우랄 호스트가 각각 10개 폴크, 시베리아 호스트가 10개 폴크와 2개 포병대대, 우크라이나 호스트 4개 폴크, 부크 3개, 오렌부르크 1개를 제공했다. 총 69,600명의 코사크가 전선으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비정규전의 달인: 정찰, 엄호, 기습

비정규군으로서 코사크는 정찰 임무에서 탁월했다. 1812년 러시아군에 파견된 영국 연락장교 윌슨 장군은 "그들의 부지런함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들의 통찰력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의 경계심을 놀라게 할 수 없다"고 평했다. 아군 열의 측면과 후방을 엄호하고, 적진 깊숙이 무모한 기습을 감행하며, 매복전을 펼치는 등 그들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미르 전투(7월 9일)에서 프랑스군이 진격해 올 때, 코사크는 그들이 즐겨 쓰는 전술 하나를 선보였다. 코사크 분견대가 도주하는 척하며 폴란드 창기병 6개 연대 규모의 대병력을 미르로 유인했고, 그곳에서 시소예프의 폴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격렬한 돌격과 반격이 오간 뒤 적이 묶이자, 그동안 숨어 있던 7개 연대가 기습 공격을 가했다. 퇴각하던 폴란드인들은 수풀 뒤에 잠복해 있던 2개 소트니아에게 퇴로마저 차단당했다. 전투에 참가한 1,600명의 폴란드인 중 600명이 전사했고, 러시아 측 피해는 단 180명에 그쳤다.

또 다른 술수로, 7월 27일 밤 나폴레옹이 고대하던 결전이 비텝스크에서 벌어질 듯하자, 바클라이 드 톨리와 그의 코사크들은 러시아군 야영지의 모닥불을 그대로 둔 채 병력을 슬그머니 빼돌려 코르시카 출신 황제를 또다시 농락했다.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전역의 코사크 부대 (1812년)

보로디노 전투에서의 한계

그러나 그들의 독특한 기질과 개인적 희생을 꺼리는 성향 탓에, 정예 부대가 진을 친 정면 전투에서는 제 구실을 못 했다. 9월 7일 보로디노 전투에서 만취 상태였던(영광이 아닌 술에 취해) 헤트만 플라토프 휘하 코사크는 프랑스군 후방이라는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돌격을 멈췄다. 이틀 뒤 전위 전투에서 라파엘 데 란자는 이 무력함을 증언했다.

하지만 보로디노 이후 전열을 정비한 러시아군에, 코사크는 다시금 가장 많은 병력을 쿠투조프에게 제공했다. 돈 호스트 출신의 26개 신편 연대, 1만 5천 명의 무장한 기병이 합류한 것이다. 이 전례 없는 병참 노력은 플라토프 헤트만의 오명을 씻어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백작 작위를 안겨주었다. 평시라면 과도해 보였을 병력이지만, 1812년 전역의 결말이 달려 있는 상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전역의 코사크 부대 (1812년)

모스크바 점령기와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프랑스군이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에도 코사크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조제프 나폴레옹 연대 4개 대대 중 하나를 지휘하던 스페인 장교 라파엘 데 란자는 "프랑스군에 식량이 부족했다. 마루더(약탈병)들이 군수품을 구하러 나갔다가 코사크의 창끝을 맛보곤 했다"고 기록했다. 나폴레옹이 남쪽 퇴각로를 열려 했으나 10월 24일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에서 패했고, 이튿날 부르고뉴 하사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전역의 코사크 부대 (1812년)

란자는 같은 사건을 덜 시적으로, 더 처절하게 묘사했다. "10월 25일 새벽, 2천 명의 코사크가 숲에서 튀어나와 매복을 펼친 탓에 모든 포병을 잃었다. 그들은 기둥을 베어내고 보이는 대로 죽여 대열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바로 그 상황에 황제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를 잡기 좋은 기회였다. 그의 근위대와 부관 3명, 장군 1명이 창에 찔렸다." 그 뒤로 나폴레옹은 아편, 벨라돈나, 흰 헬레보루스가 든 약병을 목에 걸고 다녔고, 10월 26일 새벽 대육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대육군의 퇴각: 코사크의 전성기

모스크바에서의 철수는 코사크가 정규 기병대라면 와해됐을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불멸의 명성을 얻은 계기였다. 뷔르템베르크 출신 야코프 발터가 퇴각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 지방 말"을 구해 탔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전역의 코사크 부대 (1812년)

혹독한 러시아 겨울, 코사크는 프랑스군 후위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데 그치지 않고, 본대에서 떨어진 수색대라면 모조리 섬멸하며 적의 보급을 차단했다. 란자는 "스몰렌스크에 10만 대군이 있어 코사크 떼를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길 양옆에서 그들을 마주해야 했고, 조금만 떨어져도 창에 찔렸다"고 회고했다.

불타는 마을의 온기를 찾아 대열을 이탈했다가, 다시금 그 말의 "비상한 지혜"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발터의 증언도 전해진다.

게릴라전과 1813년 독일 전역

체르니쇼프나 다비도프 같은 노련한 장교들이 이끄는 비행대나 독립 부대에 편성된 코사크의 대담함은 나날이 커졌다. 10월 중순에는 바르샤바 공국 깊숙이 파고들어 폴란드군과 파르티잔을 교란시켰고, 침략자들은 후방 걱정을 시작해야 했다.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전역의 코사크 부대 (1812년)

1813년 초, 코사크는 독일 땅을 제집처럼 누비며, 러시아 퇴각로에서 기병 전력이 궤멸된 적에게 악몽이 되었다. 프랑스 통신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황실 전령을 연이어 가로챈 덕분에, 러시아 지휘관들과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후 합류한 연합군 지휘관들은 나폴레옹의 의도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아군도 코사크의 오인 사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연이은 오인 사고 끝에, 많은 연합군 장교들(다수가 파란 군복을 입었다)은 흰 완장을 차고 프랑스군과 구별해야 했다. 이후 몇 달간 코사크는 또 다른 본성, 약탈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다. 포로 신세가 된 란자는 "카코의 덕성을 조금도 갖지 못한 러시아 진영을 가로지르는, 세상에서 가장 도둑질 잘하는 자들"이라고 코사크를 평했다. "주여, 코사크에게서 우리를 구하소서(De cosaquibus Domine, libera nos)"라는 기도문이 독일 전역에 울려 퍼졌고, 많은 연합군 장교들이 약탈을 막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코사크 못지않게 탐욕스러운 뢰벤슈테른 대령조차 그들로부터 제 몫을 챙기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코사크는 전리품을 평등하게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무모한 기습으로 코사크가 베를린 거리를 누볐고, 얼마 뒤 3월 4일 프로이센 수도가 러시아 수중에 떨어졌다. 러시아 전역은 끝났다. 독일 전역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