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세계 최초의 경제 거품은 바빌론에서 시작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에 숨겨진 부채 패키지와 정크 부채의 기원

우리는 흔히 경제 거품이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공동선보다 자신의 탐욕을 앞세우는 일부 인간의 습성은 훨씬 더 오래되었으며, 그 흔적은 인류 최초의 법이 등장했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메소포타미아 유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단연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위대한 왕 함무라비가 일련의 법률을 집대성한 이 석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아마도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시대착오적인 규범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혼한 여성에게 매우 유리한 조항이 있을 만큼 의외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탄생한 법 체계였던 것입니다.

바빌론 이전 수 세기 동안 수메르인들은 비교적 동질적인, 하나로 결속된 사회상을 유지해 왔습니다. 아카드인에게 정복당하고 반란과 반격이 되풀이된 후에도 두 민족은 이후 120년간 산악 침략자들의 지배를 받았기에 오히려 연대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격언이 통하던 시절이었지만, 바빌론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초의 경제 거품은 바빌론에서 시작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에 숨겨진 부채 패키지와 정크 부채의 기원

함무라비

수메르 시대의 종말은 서로를 배신하고 끊임없이 동맹을 맺고 깨는 왕과 장군들의 혼란, 한 해에 네 명의 왕이 교체될 수 있는 도시들, 그리고 들판에서 에스파드리유(삼끈 샌들) 신는 데 지쳐 멋진 목장을 딸린 작은 집을 꿈꾸며 정착한 외지인들의 침입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낡은 관습은 변해갔고, 얼핏 더 엄격해 보이는 함무라비의 법전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그 본질은 '이웃이 더 이상 당신의 전부는 아닌' 사회에서 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경멸하던 '외지 출신'의 이웃은 낡은 샌들을 벗고 당신이 살찌워야 했던 돼지를 훔칠 수도 있는 존재였으니까요. 바빌로니아 시대 사람들은 이런 분쟁을 해결하는 데 익숙해졌고, 그래서 법은 '치아에는 치아'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콜롬비아산 넥타이 하나 받는 것보다 살찐 돼지를 돌려받는 편이 훨씬 나았던 시대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변화한 관습 중에는 경제적 관행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수메르 사회는 물물교환과 분배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지배층으로 돌아가고 죽과 순무국만이 하층민에게 남는 불평등한 분배였지만, 평소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일부 관습은 서민에게 유리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수메르 사원은 합당한 이율로 돈을 빌려주는 은행 역할을 했습니다. 농부가 딸의 혼수를 위해 은이 필요하면 사원에서 양을 그에 상응하는 금액의 금속으로 교환할 수 있었고, 좋은 수확을 기약하며 대출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카드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체계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위대한 사르곤의 아들인 마니슈투수 왕 같은 셈족 계열 통치자들이 왕관을 지지하고 반역을 막기 위해 토지를 매입했는데, 그 토지는 십중팔구 작은 사원들의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부자들은 재산을 축적해 사원을 잠식했고, 사원과 달리 그들은 기꺼이 재산을 나누거나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에는 모든 것이 이미 달라져 있었습니다. 사원은 왕관을 제외하면 더 이상 대출을 제공하지 않았고, 안뜰 청소부까지 포함되던 길었던 노동력 명단은 '합리적이고 필요한' 수준으로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급여는 줄고 비용도 줄었습니다. 사원에 서기관이 필요하면 직접 고용하지 않고 계약을 맺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이 하청 구조가 우리에게 무척 현대적으로 느껴지시나요? 놀랍게도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1922년부터 1934년까지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 경은 우르(Ur)라는 도시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수메르의 종말과 바빌로니아 시대의 시작에 해당하는 지층의 한 구역은 수로를 통해 다른 지역과 분리되어 있었는데, 그곳의 주택은 궁전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정교했습니다. 예컨대 어느 집에는 2층과 작은 테라스가 있어 주인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개인적으로 신선한 공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울리는 이곳이 부유층이 일반 시민보다 사치스럽게 생활하던 도시의 번영한 동네라고 추론했습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는 최근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장실'로 여겨지는 유구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마침 그 집 중 하나에서는 점토판의 인상적인 기록 보관소가 나왔습니다. 두무지-가밀(Dumuzi-Gamil)이라는 부유한 사업가의 회계 장부와 서신이었습니다.

그가 탑사룸(tabsarrum)(서기관)에게 업무를 아웃소싱하지 않은 것은 비즈니스 기밀 보호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하청 서기관은 적은 대가를 받고 경쟁 업체에 각종 비밀을 유출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같은 동네의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것을 선호했고, 아니면 단순히 인색해서 뭐든 직접 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슈미-아비야(Shumi-Abiya)라는 사업 파트너가 있었고, 점토판이 보여주듯 두 사람은 사업을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제분업과 곡물 공급에 투자했고, 때로는 궁전 규모의 사업에도 손을 댔습니다. 또한 대출 업무에도 종사했습니다. 부유층에 대한 이자율은 지나치게 높지 않았고 상환 기간은 최대 5년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하급 수공업자나 소농 같은 가난한 이들에게 빌려준 경우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이때의 조건은 거의 2개월을 넘지 않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자율이 붙어 있었습니다. 복권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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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요? 관습법에 따르면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노예로 바치거나, 가족 중 한 명을 일정 기간 동안 넘겨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대금업자들이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문제는 채무자가 채권자 밑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의 밭을 경작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채무자에게는 재앙이었지요. 그리고 울리 경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그 점토판에서 또 하나 발견된 요소가 있습니다. 두무지-가밀과 다른 이들이 때때로 채권을 제3자에게 재판매(매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부채 패키지'라고 부르는 거품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는 동일한 대금업자나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인수된 안정적인 채권도 있었고, 감당 불가능한 '정크 부채'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 사업가들은 빚이 갚아졌는지 여부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재판매와 재판매 사이에 가치를 부풀리고 노예 노동력을 확보해 원가를 줄였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가 목격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경제 거품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밭은 방치되고 빚은 갚히지 않았으며, 일부는 다수의 서민을 희생시키며 인위적으로 부유해졌습니다.

세계 최초의 경제 거품은 바빌론에서 시작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에 숨겨진 부채 패키지와 정크 부채의 기원

버블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나?

함무라비 법전에서 우리는 한 가지 단서를 찾습니다. 자발적 노예 신분의 기간이 최대 3년으로 제한된 조항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울러 때때로 모든 채무가 탕감되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습니다. 붓끝 한 번으로 장부를 0으로 만들고 새로 시작하는 것은 대금업자들에게 뼈아픈 일이었겠지요. 크리스마스 캐럴의 과거·현재·미래의 유령이 아직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말입니다. 그래서 바빌로니아의 스크루지 씨들은 분노했을 것입니다. 군주의 어머니께 아뢰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재정적 쾌락이 왜 끊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말입니다. 세금 채무나 해외 사업 투자 등 일부 경우에는 채무 이전이 면제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선물 투자와 매우 흡사했기에 나름의 재미는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매우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서두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오늘날과 똑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함무라비에게 패배하기 전 수많은 도시를 다스렸던 라르사의 왕 림신(Rim-Sin)은 부채 탕감 제도를 무척 급진적인 방식으로 시행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우르에서 발견된 점토판과 그 지역을 덮친 몰락의 흔적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하나 이상의 대금업자를 파산시켰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두무지-가밀과 그의 파트너가 그 부유한 동네의 개울이나 운하에 몸을 던진 사람들 중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된 나날을 보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날의 지도자들이 우리 조상들의 모범을 따랐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늘날의 상황과 정반대로, 저 고대 군주들의 머릿속에는 '은행가 구제 금융'…… 다시 말해 '대금업자 구제'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공: Joshua BedwyR, 진한 푸른 세상에서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