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가정은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며, 거의 실현될 뻔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지리학자들은 라임스 아라비쿠스(Limes Arabicus) 너머의 아라비아 반도를 세 개의 크지만 경계가 분명치 않은 영토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아라비아 페트레아(Arabia Petraea), 즉 오늘날의 요르단과 시나이 반도, 시리아 남부에 걸쳐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옛 땅입니다. 이곳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코르넬리우스 팔마에 의해 로마 속주로 병합되었고, 635년 비잔티움이 이슬람 세력에게 이 지역을 상실할 때까지 제국의 손안에 있었습니다. 둘째는 아라비아 데세르타(Arabia Deserta), 유목민들만이 거주할 수 있었던 반도 한가운데의 험난하고 살기 어려운 불모지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입니다. 반도 남서쪽 끝자락으로 현대의 예멘과 오만에 해당하는 크기이며, 성경에 언급된 전설적인 사바 왕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땅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세 번째 영토, 아라비아 펠릭스에 주목하겠습니다. 로마의 무자비한 탐욕을 자극하기에 가장 매력적인 땅이었으니까요. 이미 그리스 여행자들은 이 지역을 '비옥한 아라비아'라 불렀는데, 여기에는 토착 셈족 언어 y-m-n(비옥함을 뜻함)의 영향도 작용했습니다. 반도의 해안과 산악 지역은 정기적으로 비가 내렸고, 불규칙하지만 흐르는 강과 식수가 확보되었으며, 동방에서 들어오는 향신료 해상 무역의 필수 통항로이자 동시에 통행료를 걷는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인도산 계피의 독점권까지 더해졌습니다. 이 야생의 땅은 당대 에쿠메네의 모든 신전이 요구하던 향(香)을 생산했고, 상인들은 그 덕에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또한 볶아서 각성 음료로 마시는 작은 열매도 재배되었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 과일을 모카라는 이름으로 마시고 있습니다. 이름의 유래는 커피를 수출하던 아랍 항구 도시 모카입니다.

하지만 부의 후광 뒤에는 반드시 까치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고대 전체를 통틀어 로마 속주 총독보다 탐욕스러운 존재는 없었습니다. 로마 밖에서의 권력은 수명이 짧다는 것,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조금만 참으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던 법무관들이었으니까요. 때는 기원전 26년,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목숨을 잃은 지 4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초대 로마 총독이자 시인이며 아우구스투스의 개인적 친구였던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이집트 속주를 약탈해 사재를 불렸다는 이유로 파면되었고, 그 빈자리는 아일리우스 갈루스가 차지했습니다. 어두운 전력을 지녔으면서도 내세울 만한 군사적 업적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프린켑스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총독 아일리우스 갈루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관저를 출발점 삼아 아라비아 펠릭스를 향한 '무장 탐사'를 감행합니다. 디오 카시우스와 대(大) 플리니우스는 이 사실과 함께, 총독이 프라이토르(법무관) 시절부터 교분을 쌓았던 그리스 지리학자와의 두터운 우정에 대해서도 전해 줍니다. 결국 그 탐험의 결실을 유일하게 거둔 인물이 되는 사람 말입니다. 바로 스트라본(Strabo)입니다. 이 호기심 많은 그리스 학자는 이미 아일리우스 갈루스와 함께 아스완, 즉 이집트 속주 최남단 국경까지 나일강을 따라 여행한 바 있었고, 에쿠메네의 구석구석을 기술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었기에, 미지의 부유하고 적대적인 땅이라 여겨진 곳으로의 위험한 침입을 부추긴 인물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원정은 나쁘게 시작되었고, 나쁜 시작은 더 나쁜 결말로 치달았습니다. 아일리우스 갈루스는 평판이 좋지 않았던 나바테아인 안내자 실레우스(Syllaeus)를 맹신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원정 초반부터 그는 병력을 짐승에게 먹이고 갈증을 채울 물조차 거의 없는, 황량하고 뙤약볕에 그을린 불모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수백 년 뒤 스페인 무적함대가 겪은 재앙과 흡사하게, 갈루스는 아랍 기병을 향해 필룸(pilum) 한 자루 던져 보기도 전에 혹독한 자연환경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광활한 아라비아가 지키고 있던 보물에 도달하려는 시도 끝에 6개월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총독은 알렉산드리아로의 회군을 결정했고, 그 대가로 군대의 3분의 2를 잃었습니다. 아마도 이 처참한 재앙이 빚어진 결과 때문에 그는 이집트 총독직에서 물러났고, 그 자리는 더 뛰어난 군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절친한 친구인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에게 돌아갔습니다. 훗날 메로에의 정복자가 될 인물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