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나폴레옹 전쟁 최대의 기병전 '리베르트볼크비츠 전투' – 라이프치히 전투의 전주곡

나폴레옹 전쟁 최대의 기병전  리베르트볼크비츠 전투  – 라이프치히 전투의 전주곡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남쪽 리베르트볼크비츠(Liebertwolkwitz) 일대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기병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곧이어 펼쳐질 '민족들의 전투', 즉 라이프치히 전투의 서막을 여는 격돌이었다.

무라트에게 내려진 저지 명령

나폴리 왕 무라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연합군 보헤미아 방면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유리한 지형을 선택했는데, 리베르트볼크비츠·겔덴고사(Gueldengossa)·바하우(Wachau) 마을 사이에 펼쳐진 평탄한 고원에 갈겐베르크(Galgenberg) 언덕이 병력을 은폐해 주고, 프랑스 포병이 전장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슈바르첸베르크의 신중함과 비트겐슈타인의 추격

최근 내린 비로 진흙탕이 된 도로는 신중한 연합군 총사령관, 오스트리아 황자 슈바르첸베르크의 진격을 늦추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방면군 선봉을 지휘하던 비트겐슈타인 장군은 공격 명령을 받고도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무라트의 물러남을 후퇴로 해석하고 단순한 후위 부대만 마주칠 것이라 기대하며 추격에 나섰다.

1만 대 6천, 기병전의 개시

습하고 추운 가을 아침, 짙은 안개가 걷히자 정찰을 나선 코사크 부대로부터 강력한 적 기병과 이미 교전 중이라는 보고가 이어졌다. 무라트는 79개 중대에 달하는 거의 1만 명의 기병을 보유한 반면, 연합군 기병은 6,000명에 불과했다. 이미 되돌리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이어진 것은 전형적인 기병전이었다. 혼란스러운 돌격과 반격의 연속, 새로운 병력의 투입으로 중단된 추격, 후방에서의 재편성, 그리고 다시 돌격. 주도권은 승리의 여신처럼 수시로 바뀌었다. 폴란드 흉갑기병, 창기병, 용기병, 프랑스 경기병이 차례로 돌진했지만, 연합군 기병도 끊임없이 반격을 퍼부었다. 수적 열세에도 연합군 기병은 더 뛰어난 기수들의 솜씨와 전술적 유연성으로 프랑스군의 밀집 종대에 맞섰고, 중기병들은 분대 단위로 전개해 측면을 위협할 수 있었다. 반면 프랑스 기병대는 여전히 러시아 원정의 참사로 인한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격화되는 전투, 실레지아 흉갑기병의 무모한 돌격

리베르트볼크비츠 기병전은 점점 더 많은 연합군 기병 연대가 지원에 나서면서 격화되었다. 돌격과 반격이 교차하는 가운데, 실레지아 흉갑기병이 보여준 것처럼 적 포병 포대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노획한 대포를 자군 진지로 끌고 가려던 프로이센군은 처참한 대가를 치렀다(전투가 끝날 무렵 그들의 손실은 병력의 32%에 달했다). 이 혼전 속에서 무라트는 두 차례나 포로로 잡힐 뻔했으나, 곁에 있던 이들의 용맹한 개입 덕분에 극적인 위기를 넘겼다.

나폴레옹 전쟁 최대의 기병전  리베르트볼크비츠 전투  – 라이프치히 전투의 전주곡

클레나우의 제4군단, 마을 공방전

그러나 모든 기병전이 그렇듯 이 교전 역시 결정적이지 못했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클레나우(Klenau) 장군의 제4군단에 리베르트볼크비츠 마을을 공격·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클레나우는 즉시 전투에 투입되어, 경기병의 끊임없는 위장 공격으로 보병 측면을 적의 돌격에서 보호하고, 지형을 교묘히 활용해 진격 부대를 적의 시야에서 가렸다. 리베르트볼크비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군단은, 연합군 기병에게 큰 타격을 입혀왔던 마을 인근의 포병 포대를 철수시키도록 몰아넣은 프랑스군에게 완전한 기습이었다.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기병전과는 대조적으로, 마을을 둘러싼 공방전은 거리마다, 집집마다 진영이 수시로 바뀌는 치열한 시가전이었다. 오후 2시, 리베르트볼크비츠는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무라트의 대반격, 밀하우드와 레리티에의 용기병

이 시점에서 어떤 프랑스 지휘관이라도 철수를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라트는 평범한 사령관이 아니었다. 마을 수비대에 가해지는 압박을 두 배로 높이는 한편, 그는 마지막 돌격을 위해 정예 기병을 배치했다. 오후 2시 30분, 프랑스 포병의 포성이 잦아들고 포연 속에서 무시무시한 용기병 집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하우드(Milhaud)와 레리티에(L'Héritier) 사단이 폴란드 흉갑기병이 이끄는 빽빽한 편대 종대를 이루고, 경기병이 후방에 배치된 진형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최대의 기병전  리베르트볼크비츠 전투  – 라이프치히 전투의 전주곡

연합군 기병의 우월성 입증

연합군 포병은 밀려오는 인파에 포탄을 쏟아부었지만, 그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충격적인 광경에 주눅 들기는커녕, 브란덴부르크 흉갑기병은 실레지아 울란, 수미(Sumy) 연대와 루브니(Lubny) 연대의 러시아 후사르, 에르초크 페르디난트 후사르 연대 소속 오스트리아 중대들, 그리고 호엔촐레른의 슈발레거(Chevauxlegers)와 카이저(Kaiser) 흉갑기병 연대의 지원을 받으며 진격해 나갔다.

연합군 기병의 첫 번째 돌격은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두 번째 돌격은 그들을 후퇴시켰다. 1813년, 연합군 기병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한 것이다.

전투의 결과와 라이프치히의 서막

리베르트볼크비츠에서 무라트가 패배하면서 라이프치히 전투의 흐름이 촉발될 수도 있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또다시 주도권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중요한 교전에 투입되고도 압박을 지속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군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고 있던 리베르트볼크비츠에서 클레나우의 위태로운 진지를 강화하지도 않았다. 몇 시간의 혈전 끝에 오후 6시경,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이 마지막으로 버티던 교회를 점령했다.

이로써 리베르트볼크비츠 전투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민족들의 전투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운명을 바꿀 대격돌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